2024.10.13 (선선한 가을) @킴스룸, 라떼
“언제쯤이면 우리는 엄마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워질까?” 갓 나온 바지락볶음에서 조갯살과 껍데기를 분리하며 지언이 말했다. “엄마는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나쁜 딸이 되는 것 같은 상황을 만들어. 이게 어릴 때부터 반복되는 패턴이라니까.” 9월 말의 어느 저녁 시간에 엄마 전화가 걸려 왔다. 엄마가 10월 1일부터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서면에 있는 호텔을 임대받아 운영한다고. 그동안 경제적으로 힘들었고 최근에 위기 상황이 와서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고 면접도 봤지만 잘 안됐다고. 호텔 운영은 20년간 부동산중개업을 하며 쌓은 신뢰로 잡은 절호의 기회라고. 속사포 랩을 하듯이 6개월 아니 일 년 치의 숨겨둔 이야기를 한 번에 쏟아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게 무슨 상황인지 따라가기 바빴다. “그래서 너 이제 10월부터 호텔 사장 딸이다. 하하하.” 마무리를 이렇게 한다고? 엉망이 된 옷장을 억지로 욱여 닫듯 말을 끝내는 엄마에게 무슨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몰랐다. 아 그래? 잘 된 거 맞지? 이미 계약을 한 거야? 그럼 내일모레부터 시작하는 거네. 근데 왜 중간에 말을 안 했어? 놀라고 황당한 마음들이 잘 숨겨지지 않았다. 큰 일을 할 때는 그 일이 다 될 때까지 입을 꾹 다무는 거라고 그래야 일이 되는 거라고, 7살 때부터 들었던 그 말을 또 할 뿐이었다. 엄마의 그 믿음 때문에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중간 과정을 공유받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결론을 알게 된 적이 많았다. 이미 결정된 일에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숙박 사업은 엄마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인 건 물론이고 대부분 온라인 플랫폼에서 예약이 이뤄지기 때문에 온라인에 익숙하지 않은 엄마가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력 관리나 제품 관리, 재무, 세금 관리는 어떻게 할 건지 … 커다란 파도가 밀려오는 게 보였다. 파도는 마치 초대받은 듯 정확히 엄마에게로 가고 있었고 엄마는 맨 몸이었다. 지도를 찾아보니 구시가지의 작은 모텔이었다. 리모델링한 지 10년쯤 되었고 넷플릭스가 안 돼서 불편하지만 주차장이 넓어서 좋다는 후기가 있었다. 개천절이었다. 며칠째 아무 연락이 없길래 먼저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목이 잠긴 엄마가 있었다. 엄마 목소리가 왜 그래? 어젯 밤에 잠을 좀 못 잤어 야간 카운터 일 배우느라. 밤을 샌거야? 엄마 연세에 밤 새면서 일하면 어떡해. 계속 컴퓨터 프로그램 들여다보고 있느라 목이 잠긴 거지 괜찮아. 스피커폰으로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지언이 불쑥 말했다. 어머니! 저희가 가서 좀 도와드릴까요? 그렇게 갑자기 부산에 갔다. 2박 3일 시간을 빼서 갔는데 결국은 1박 2일 만에 돌아왔지만. 엄마와 함께 있기가 힘들었다. 허둥지둥하고 경직되고 긴장하고 불안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엄마를 바로 옆에서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엄마 괜찮아? 엄마는 ‘재밌다’고 했다. 눈은 불안한데 입만 웃고 있는 사람 같았다. 작별 인사를 하며 엄마를 살짝 안았다. 몸이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졌다. 서울에 돌아와 며칠간 트라우마 상태로 지냈다.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왜 이렇게 걱정하게 만드는지, 도와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슬그머니 나눠지는지, 이런 불평을 하는 내가 나쁜 딸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지. 그러다가도 불시에 엄마가 이것 좀 주문해달라며 전화가 오면, 별말 없이 해줬다. 생각과 행동이 냉탕과 열탕을 오갔다.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헷갈렸다. 그날 밤 명상 방석에 앉아서 낯설지 않은 아이를 만났다. 12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울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혀오며 왼쪽 가슴이 뜨겁게 느껴졌다. 왼쪽 얼굴까지 열감이 올라왔다. 아이는 화가 나서 울고 있었다.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언어가 부족했다. 나도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내면 아이가 화가 났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그동안 엄마에게 쉽게 화내지 못했다. 분노는 내가 가장 오랫동안 억압해 온 감정이었다. 아이는 존중받고 싶어 했다. 자기 의견을, 자기 감정을, 자기 존재를. 나는 아이를 꼭 안아줬다. 늦어서 미안해. 이제 네 이야기를 들어줄게. 내가 여기에 있을게. 너를 모른 척하지 않을게. 아이는 엄마가 떠날까 봐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 의견을 드러낼 수 없다고. 엄마가 없는 삶은 끔찍하다고 했다. 엄마가 떠나지 않게 하려면 엄마 말을 잘 듣고 엄마를 기쁘게 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 아이가 얼마나 두려웠을까. ‘혼자서도 할 일 잘하고 걱정 한 번 시키지 않는 딸’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아이를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엄마는 절대로 너를 두고 떠나지 않아. 나도 너를 혼자 두지 않을게. 그동안 정말 외로웠겠다, 혼자서 많이 무서웠지? 엄마에게 너의 의견을 존중해달라고 말해도 괜찮아. 설령 그게 엄마를 불편하게 하더라도 그건 엄마 몫이지 네 책임은 아니야. 아이는 내 말을 의심하면서도 끝까지 들었다. 주말에 친구를 만났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냐기에 ‘엄마 놓아주기’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 안에 엄마를 놓아주고 현재 있는 그대로의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귀를 쫑긋하고 내 이야기에 공감해 주는 친구가 앞에 있어서인지, 내면 아이가 불쑥 튀어나와 자기가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씩씩거리기도 했다. 이제 엄마와 대화하고 싶어졌다. 떼쓰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지금의 나로서 존재로서 엄마와 소통하고 싶었다.
그때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고다에 방 좀 등록해줄 수 있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