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을 가르치는 일은 흥미진진하다. 명상은 마사지나 체외 충격파 치료처럼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주도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테크닉이다(이 지점에서 심리 치료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명상을 가르치려면 그 사람이 단순히 문제를 겪고 있는지 파악하는 걸 넘어서 어떤 어려움을 갖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한데, 도무지 어떻게 하는지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 선생님은 백 퍼센트 당사자의 경험과 언어적인 표현에 의존해야 한다. 이 독특한 조합 덕분에 명상 선생은 배움과 교수법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한켠으로 매일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
명상
과일 '배'에 대해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한 명은 한국 사람이고 한 명은 프랑스 사람이라면 둘은 같은 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사실은 전혀 다른 배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거다. 배는 그 생산지에 따라 향과 맛, 질감이 모두 이질적인 과일이기 때문에 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세상에 다양한 배가 있다는 걸 아는지, 서로 같은 배를 이야기하는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건 명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생각하는 명상이 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명상의 종류는 거의 무한할만큼 많고, 이질적이어서다.
몸으로 할 수 있는 놀이인 스포츠의 가짓수를 잠시 떠올려본다. 축구, 농구, 육상, 수영, 격투기, 양궁.. 그러면 내 주의와 의식을 갖고 할 수 있는 놀이인 명상도 셀 수 없이 많은 게 당연하지 않을까. 괴로운 기억을 의도적으로 떠올리고 계속해서 버리는 것을 상상하는 기법도 있고, 절대자에게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방법도 있고, 나를 편안하게 하는 장면을 시각적으로 상상하는 기법이나 독특하게 호흡을 제어하는 기법, 터치를 활용해 신경생리적으로 정서를 조절하는 기법, 주의를 날카롭게 인지하고 하나의 대상에 묶어두는 기법도 있다. 이 세상 거의 모든 종교에는 나름의 명상법이 있으니, 종교만큼 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명상에 대한 정의도 다양해서, 내면을 돌아보고 사색하는 모든 활동을 명상(contemplative practice)으로 폭넓게 정의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감각을 통해 생각과 욕구를 내려놓는 것만을 명상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그 수많은 명상 가운데서도 마음챙김과 감각 명상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전통적 수련법이면서 과학적인 방식으로 효과가 검증된 기법이다. 오해를 덜기 위해 이 두 가지 수련법에 국한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명상이 눈만 감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부드럽고 안정적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는 순간처럼 분명하게 지향하는 상태가 있다. 애매모호하지도, 신비롭지도 않다. 수련을 하다보면 종종 신비로운 통찰을 얻게 되기도 하지만, 그건 부산물일 뿐이다. 이제까지 명상이 굉장히 특수한 일이며, 신비하고 알쏭달쏭한 활동으로 취급되어온 이유는 명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적이고 내면적인 활동이어서, 그리고 이질적이고 다양한 명상이 같은 '명상'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제대로 하고 있는지 눈이나 지표로 곧바로 확인할 수도, 뭐가 명상인지 알 수도 없어서, 속을 내비치지 않는 사람마냥 오해를 많이 샀나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멍 때리기에 대한 오해도 다음에..)
배우기도 기술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그닥 즐기지 않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좋아한다. 운동이든, 예술이든, 언어든, 학문이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연마하면 그 활동을 점차 잘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배우는 것 자체를 조금 더 잘하게 되는 걸 느낀다. 자꾸 배울수록 또 다른 것을 배우는데 어려움이 적어진다. 배운다는 게 뭔지에 대한 나름의 관점이 생겨서다. 그때부터는 배움 자체가 하나의 기술로 와닿는다.
배우기에 대한 착각
당장 꽃을 잘 꽂아서 마음에 드는 것이 나오는 게 중요한가, 아름다운 꽃의 조합을 보는 안목과 자신만의 관점을 키우는 게 중요한가 하면 단연코 후자가 중요하다. 이번에 내가 운좋게 꽃을 예쁘게 꽂았어도, 어제보다 오늘 아름다운 꽃에 대한 안목이 나아지지 않았다면 학습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다음에 꽂을 꽃도 아름다울 것이라고, 혹은 나만의 스타일이 묻어날 거라고 예측할 수 없으니 말이다. 실제로 어떤 결과를 당장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여겨지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걸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소프트웨어다. 배움에 있어서는 소프트웨어를 갖는 것이 중요하지, 좋은 결과물을 얻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꽃을 잘 꽂으려면 '스파이럴' 같은 꽃꽂이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완벽하게 그 테크닉을 구사한다고 해서 꽃꽂이를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치료사 선생님의 예시를 빌려다 쓰자면, 집에 엄청 많은 수도꼭지가 달려있다고 가정해보자. 많은 경우 다양한 모양의 수도꼭지를 잠그는 법을 배우는 데에 매몰되곤 한다. '스파이럴'을 잘 익히고 나면 꽃꽂이를 마스터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중요한 건 수도꼭지를 잠그는 기술보다도 어떤 수도꼭지에 물이 새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주사 바늘을 정확히 정맥에 찔러 넣고 채혈을 하는 기술을 익히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꾸 발작을 일으키는 환자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는지, 그걸 체크하기 위해 어떤 검사를 하고 또 어떤 지표를 확인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훨씬 어렵다. 꽃꽂이를 예시로 들어본다면, 선과 선이 어떻게 만나야 조잡해보이지 않고 아름다운지, 그리고 나는 어떤 작업을 해나가고 싶은지를 찾는 것은 스파이럴을 어떻게 하는지 배우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오래 걸리는 일인 셈이다. 숙련자가 되는 건 전체를 보는 안목과 자신만의 관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가르치기에 대한 착각
1
가르치는 것과 수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능력이지만, 보통 잘하는 사람이 좋은 선생님이 될 거라고 가정한다. 운동 선수였던 사람들이 운동을 가르치는 일을 커리어로 선택하는 경우도 많고, 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이 영어를 가르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자신이 수행력이 뛰어나다고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술이든 조금 더 유리한 사람이 있다. 역도 천재 장미란 선수는 처음부터 다른 선수들과 확연히 다른 기량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피아노나 바이올린, 발레, 심지어는 공부도 그렇다. 모든 일에는 특정한 기량이 요구되는데, 처음부터 어느 정도 그 종목에 유리하게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 타고난 경우에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바닥부터 익혀야 하는 감각을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한 번도 그것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럴 때는 무조건 반복 연습으로 극복하도록 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학습에 그다지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다. 처음부터 수월했던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적절하고 상세한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가르칠 때 불리할 수 있다. 그래서 선생님은 잘 못하는 사람이었던 과거가 있을 때 더 훌륭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시원스쿨?) 그들이 지도하는 사람들은 그들처럼 타고난 능력을 갖지 않은 일반인들이어서다.
일단 교수법은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기 때문에 새롭게 배워야 하는 영역이며, 조금 다른 역량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피겨스케이팅에 타고난 역량을 가진 사람이 있듯이 커뮤니케이션 역량이 타고나는 사람도 있다. 게다가 아무리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교수법이 나아지려면 배움에 대한 지적인 공부와 성찰이 필요하다. 사람이 어떻게 학습하는지에 대해 공부하고 수업에서 적용해보면서 한참 반성했다. 이제까지 무작정 반복 학습을 시킨 게 사람들의 지적인 배움을 가로막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잘 수행하는 사람은 좋은 선수가 되고, 잘 가르치는 사람이 좋은 선생님이 된다.
2
달리기 수업에 가서 달리기를 배우다 보면 몇 가지 드릴을 알려주고 천천히 뛰라고 하니 별 거 아니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 수업은 또 어떤가. 사과를 놓고 그리라고 한다. 어떨 때는 왼손으로 그리라고 하고, 어떨 때는 사과의 본질만 그리라고 한다. 이거 나도 하겠는데? 싶다. 마찬가지로 명상을 가르치는 사람을 보면 맨몸으로 와서 숨에 집중하라고 하고 떠나버리니 참 쉬운 일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하나의 수업을 똑같이 진행할 수 있는가, 가 아니라 왜 그런 수업을 꾸렸는지를 분명한 의도를 갖고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는 역량에 있다. 이것도 결국 수도꼭지에 대한 이야기다. 선생님들은 제대로 '배우게' 하기 위해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다.
예전에 PT를 받았다. 트레이너 선생님은 매번 대체로 정해져 있는 운동을 시켰다. 매일 정해진 운동을 반복하다보면 왜 맨날 비슷비슷한 운동만 하지? 나도 집에서 이 운동 하면 되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때 그런 생각을 했던 것만 봐도 왜 내가 제대로 운동을 배우지 못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는 그런 움직임이 나에게 왜 필요한지를 파악하는 능력과 정확하게 수행하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안목에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때 내가 그 선생님께 왜 그런 운동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주로 확인하는 것인지 물어볼 걸 그랬다.
명상을 잘하는 사람
'선생님, 사람의 차크라가 보이시나요?'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차크라가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지가 명상 숙련자의 기준일까. (차크라가 보이지 않는다고 답했을 때 그 분의 눈빛에서 나타난 실망감이란.) 또 이런 질문도 여러 번 받았다.
'숨 명상할 때 얼마나 빠르게 마음이 고요해지세요?'
명상을 잘 하는 사람은 가장 빠르게 숨에 주의를 집중해서 마음을 진정시키는 사람일까. 그건 꽃꽂이를 할 때 능숙하게 '스파이럴'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겠고, 스키를 탈 때 완벽하게 '카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나 수영할 때 정확한 자세로 스타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일 거다. 하지만 완벽한 스파이럴, 카빙과 스타트가 그 사람이 그 종목에 숙련됐는지를 드러낸다는 건 착각이다. 그 사람이 그 스포츠를 제대로 배우고 연마한 사람인지를 확인하려면 필요할 때마다 적재적소에 간결한 움직임으로 위의 기술들을 구사할 수 있는 전체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러니까 기술의 성공과 실패가 제대로 배웠는지를 확인하는 척도는 아니라는 거다.
명상을 잘 하는 사람을 굳이 정의해본다면 어떨까. 자신의 삶에서 명상의 위치와 쓰임을 파악하고, 자신의 상태에 따라 필요한 수련을 해나갈 수 있는 사람이다. 숨 명상, 바디스캔을 할 때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를 경험하는 것, 그것을 찾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일종의 시작점이다. 수도꼭지 잠그는 법을 하나 하나 익히는 것이다. 그럼 내 몸에 대한 인지를 강화해서 언제 명상이 필요한지를 스스로 파악할 수 있는 수련을 할 것이다. 불안감이 높아지는 시그널을 예민하게 캐치하게 되고, 그때 나에게 가장 효과적인 수행을 찾아나설 수 있다.
요가를 배우기
요가에 빗대어 설명한다면 쉽게 와닿는다. 특히 요가원에서 무리한 자세에 도전하다가 허리가 삐끗하고, 고관절이 달랑거리고, 무릎이 아팠던 경험이 있다면 말이다. 대체 요가를 잘하는 건 뭘까. 요가를 잘하는 건 아사나(자세)를 잘 만드는 걸까? 아사나를 잘 만드는 것에 자꾸 집중하게 되고, 그 화려한 이미지에 자꾸 혹하게 되지만, 아사나를 잘 만드는 건 좋은 요가 수련의 부산물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요가 수행을 하면 차츰 따라오는 것이지, 자세를 만드는 게 그 자체로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하면 '자세 만드는 걸 배우는 것=요가를 배우는 것' 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요가가 심신수양법으로 고안된 것을 고려하면 일반적인 요가 수련의 목표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다. 둘 중에서는 보통 신체적 건강이 목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열반에 오르기 위해서 요가를 하는 사람들은 일단 제외로 둔다.) 자세를 만드는 것이 신체적 건강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신체적 건강을 위해서 자세를 만드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스포츠는 대개 승리와 패배가 있고 건강을 목표로 두지 않는데, 그런 의미에서 요가는 스포츠가 아니다.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아쉬탕가에서 더 많은 동작을 배우고 진도를 쫙쫙 빼는 게 제대로 된 학습의 지표가 되어선 안 된다. 그건 스포츠지, 요가가 아니다! 아사나를 만드느라 숨을 희생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신체적인 문제가 극대화되는 자세를 계속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괴로워진다.
신체 수양의 도구로서 요가를 배운다면, 요가는 내 몸에 필요한 움직임을 파악하고, 신체의 감각을 예민하게 인지하고, 움직임을 조절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도가 안 나간다고 너무 답답해할 필요도, 선생님이 내 손에 블록을 쥐어주고 간다고 속상할 필요도 없다. 무리하지 않고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적절한 자세에 도전하고, 적절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내 몸을 잘 컨트롤할 때의 감각을 경험하고 기억하도록 도와준다.
백날 수업을 들어도, 내가 배우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놓치면 숙련자가 되기 어렵다. 내가 뭘 배우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야말로 배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수도꼭지 잘 잠그는 것에 매몰되지 말고, 무슨 수도꼭지를 잠궈야 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 명상을 배우는 데 실패하는 이유에 대한 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