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산 넘어 해가 환히 얼굴을 내민다. 일기를 쓰고 있는데 틱틱틱틱 소리가 나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벌레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시골에서 벌레가 나타나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고개를 다시 돌려 일기를 이어 쓰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보다 격렬한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녀석이 발라당 뒤집혀서는 허공에서 발을 바둥바둥 휘저으며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다 이내 지쳤는지 가만히 멈춰 있었다. 유심히 녀석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설마 죽은 건가?’ 싶어 퍼뜩 연필로 살짝 등을 건드려 원래대로 뒤집어주었다. 그러자 바닥에서 통! 가볍게 튀어 오르더니 뒤뚱뒤뚱 느릿느릿 그러나 녀석이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묘한 기분이 들었던 건, 나의 무심한 손가락질이 녀석에게는 생과 사를 결정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작 나에겐 의미 없는 가벼운 손가락질일 뿐인데, 어쩌면 신과 인간의 관계가 나와 벌레의 것과 비슷하려나.
동네 이름은 <별천지 마을>, ‘별’이 많고 하늘(‘천’) 아래 첫 동네이며 연못(‘지池’)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동네에는 연못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데 개구리울음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연못에 다다르니 얼핏 보아도 수백 마리의 개구리가 헤엄을 치고 있었고 몇몇 개구리들은 돌 위에 앉아 개구리 알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는 순간 개구리들은 단숨에 울음을 멈추고 연못 속으로 뛰어들어 자취를 감췄다. 우리는 마을 구석에 있는 연못에서 마을 어귀로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느긋하게 걸었다. 오늘의 하늘에는 솜털처럼 툭, 툭 뜯어져 정갈하게 펼쳐진 양떼구름이 찾아와주었다. 본래의 하늘은 바다처럼 드넓다는 사실에 잠시 정신이 멍해진다. 마을 어귀에는 굵직하고 반듯하게 자란 소나무들이 모여있고 그 사이에 정자 하나와 의자 몇 개가 놓여있었다. 따뜻한 드립 커피를 홀짝이면서 솔향기 가득 머금은 푸른 바람을 맞으며 숨을 쉬었다. 마치 소나무들이 내쉬는 숨을 받아 마시고 있는 것 같다. 숲과 산에 있을 때면 가끔 나무의 숨이라 느껴지는 특별한 공기가 느껴진다. 그 숨을 받아 마시며 평평한 돌 위에 눕거나 나무에 기대 잠깐 잠에 들면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정신이 맑아진다. 나무의 숨을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퍽 뜨거워진 햇살을 받으며 산책을 하고 오니 몸 곳곳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시원한 물로 땀을 씻어내고 한지문을 열어 빛과 바람을 들이고 푹신한 이불을 깔고 털썩 누웠다. 하얀 이불로 몸을 돌돌 만 채 시선이 닿은 곳은 연푸른 봄 하늘에 펼쳐진 단정한 양떼구름. 문득 5년 전, 동해의 첫 집이 생각났다. 침대에 누우면 창밖으로 감나무와 새, 그리고 하늘만 보였지. 참으로 편안하고 달콤하여 유독 낮잠 자는 걸 좋아했더랬다. 우리 둘 모두 좋아하는 노르웨이 음악가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의 서정 소품집(Lyric Pieces)을 잔잔하게 틀어놓고는 바람에 실려오는 새소리를 자장가 삼아 푸른 하늘 아래 낮잠을 잤다.
점심을 먹고 어제와 같이 카페로 향했다. 오늘은 바 테이블 자리가 아닌 구석자리에 앉아 전기현 선생님의 목소리와 향기로운 음악을 들으며 오에 겐자부로 작가님의 책을 읽었다. 문장을 읽을 뿐인데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영혼을 만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어떤 공간에서의 독서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움직인다. 책마다 주파수가 맞는 공간이 있는 지도 모른다. 지난여름, 노르웨이 외딴섬에 있는 오두막에서 자발적으로 고립된 시간을 보낼 때 읽은 책 ‘고요’(silence)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온전히 살아있었듯, 공간의 주파수와 공명하는 책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향기로운 책은 많은데 향기로운 공간은 애써 찾지 않으면 쉽게 만날 수 없다. 향기로운 고독의 가치가 비근한* 세상은 아니니 말이다.
음력 2월 15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보름달을 기다렸다. 바다에서 떠올라 산 위로 올라올 때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달을 기다리며 서쪽 하늘 멀리 사라져가는 붉은 태양의 흔적과 동쪽 하늘에 드리운 어둠 속 사라지는 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달빛의 흔적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양떼구름 사이로 달의 머리가 떠오르고 어느새 산능선을 따라 데구르르 구르는 구슬 모양의 보름달을 마주했다. 달은 멈추지 않고 떠오르더니 하늘 높이 올라갔다. 산바람이 세차게 몸을 흔들어도 나의 시선은 요지부동이었다. 600m 높이의 시골 한가운데서 만난 달은 너무나도 제자리에 있었다. 모두가 밤의 이불 아래 가는 숨을 쉬고 있는 시간, 품을 수 없는 거대한 도화지에 오직 달빛 한 줌 동심원을 그리며 빛나고 있다. 동물원에 갇힌 새를 바라볼 때와 훨훨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볼 때의 마음이 다르듯, 제자리에 있는 달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이 세상의 것들을 얼마나 제자리에서 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24절기를 만든 선조들은 늘 하늘을 바라보고 바람과 빛을 섬세히 헤아리며 시절에 이름을 붙였다. 지금은 일 년을 12개의 달로 나누고 시간을 시, 분, 초로 나눠 거기에 숫자를 붙여 인식한다. 숫자에는 경험도, 깨달음도, 과거와 현재의 연결도 담겨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숫자를 사용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지금 사람들은 직접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점점 더 빽빽해지고 높아지는 건물들은 하늘을 조각내고, 밤늦도록 꺼지지 않는 인공 빛은 밤하늘의 향기로운 어둠을 몰아내고, 탁해지는 뿌연 공기는 숨 쉬는 것을 괴롭게 해 너른 계절을 풍요로이 누리기보다는 비좁은 방안에 가둔다. 감각은 산란하여 점차 무뎌지고 보고 느끼는 방법조차 잊어버릴 위기에 처한 지금, 절기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을까. 지금 여기, 이토록 거대하여 확실하게 압도하는 자연이 있는 곳에서나 절기를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스마트폰은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다. 부러 멀리한 건 아니고 스마트폰 속 세계가 재미없었다. 넘쳐흐르도록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땐 오감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시간이 부족하다. 하물며 그 작은 네모칸에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 말고는 무언가를 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야기가 일기장에 쏟아져 나왔다. 한순간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그리고 썼다. 그러면서 내 안의 지혜가 기지개를 켜고 자기 일을 하기 시작했다. 끈적한 마음의 짐을 산뜻하게 닦아내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명료하게 나누고 지금 무엇을 하면 좋을지 들려주었다. 나는 그 지혜의 말을 부지런히 옮겨 적었다. 노르웨이 오두막에서 그러했듯 다시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리며.
* 비근하다 : 흔히 주위에서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알기 쉽고 실생활에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