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밤새 비가 내렸다. 아침에는 해가 떴는데 낮이 되자 돌풍이 불면서 먹구름이 드리웠다. 요즘은 새벽 6시가 조금 넘으면 이마 위로 햇살이 쏟아진다. 내 방은 동향이라 해가 뜨는 시간의 변화를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다.
‘아 오늘은 날이 맑게 갰구나.’
자네와 함께 뒷산을 올랐다. 비가 온 다음 날의 산은 어제와 다르다. 발바닥에 닿는 흙이 폭신폭신하다. 이미 다 져버린 줄 알았던 아카시아 향이 진한 존재감을 전한다. 자네가 쉬를 하는 동안 나도 잠시 쭈그려 앉았다. 개미가 나무 위를 오르고 진딧물이 식물의 줄기를 걸어 다닌다. 나뭇잎 위에서 어제는 구름이었을 물방울들을 보았다. 구름은 그렇게 여전히 살아있다.
최근에 수련하고 있는 호흡 명상은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완전히 다른 시각을 선물해 주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숨 쉰다고 생각했다. 들이마실 때 힘을 써서 들이마시고 내쉴 때도 내뱉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숨 쉬기를 위해 무언가 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저 숨이 내 폐로 들어오게 허락하고, 그저 숨이 내 폐에서 나가도록 허락만 하면 되었다. 나는 비로소 숨을 즐길 수 있었다.
전국의 오르지 않은 산이 없는 친구 아버지는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산에 간다’고 말한 적 있었다. 몇 년 전에 들은 그 말이 문득 떠올라 내 곁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내가 걷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땅이 나를 밀어주기 때문에 걸을 수 있다. 나는 내가 산에 오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산에 갈 수 있다. 나는 내가 앉는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의자와 바닥과 지구의 중력이 나를 받쳐주기 때문에 비로소 앉을 수 있다. 나는 내가 숨 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숨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폐가 없었다면 나는 숨 쉴 수 없을 것이다. 넉넉한 산소, 햇살과 바람, 비와 구름, 나무와 흙, 개미와 진딧물이 있기에 나는 숨 쉴 수 있다.
‘내’가 한다는 오래된 자만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쓰는 글, ‘내’가 하는 말, ‘내’가 만드는 제품, … ‘내’가 한다는 생각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만들고 싶었다. 살아있는 동안 더 많은 글을 읽고 더 많이 쓰고 싶었다. 더 많은 의미 있는 제품을 만들고자 했다. ‘나’는 많은 것을 만들어냈지만 더 많은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느꼈다. 그건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위태로웠다. 사실 내가 홀로 하고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빈자리가 생길 수 있게 했다. 그 자리는 비어있는 듯하더니, 어느새 새벽 6시의 일출과 비 온 뒤 산길의 흙 향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이내 비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