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생각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열 살 아이에게 물어봐도 그 나름대로는 이 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련하기 짝이 없는 (세 배도 더 산) 나는 머리로, 몸으로 알고 있다고 잘난 체 하면서도, 또 막상 상황이 닥치면 '이번만큼은 다르겠지. 생각대로 되겠지'하는 안일한 생각에 빠지고야 만다. 미칠 노릇이다.
최근에 일이 틀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미 수십 번은 엎어지고, 또 멤버가 바뀌고, 방식이 바뀌면서 진행되어 오던 프로젝트였다.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주말 아침에 미팅을 잡았다. 미팅을 앞두고 아침에 산을 걷고 돌아와 쑥차에 뜨거운 물을 부어둔 채 잠시 숨을 골랐다. 내 안의 목소리가 많은 것들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Sister True Dedication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가 한 법문에서 “두려움과 함께할 수 있다면 어떻게 행동할 건가요?” 질문을 던지는 부분을 찾았다. 눈빛, 목소리가 화면을 뚫고 나에게 닿았다. 순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두려워하고 있구나. 손끝 발끝까지 피가 통하는 느낌이 들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동료, 친구를 잃을 두려움. 생계 수단을 잃을 두려움. 진실을 충분히 말하는 일의 두려움. 또 진실을 마주하는 일의 두려움. 두려움이 한 줌 덜어져 있었다. 다 우려진 쑥차를 빈 찻잔에 따르고, 다기를 다루듯 마우스를 굴려 미팅 링크를 눌렀다.
미팅을 시작하고 단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모두 부은 얼굴로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말 아침 10시 30분이었다. 우리는 적당히 느린 속도로 대화를 이어갔고, 나는 경직된 내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화면에서 얼굴이 보이는 창을 제거했다. 그제야 조금은 그들과 함께 있는 듯했다. 첫 몇 번의 상호작용에서 이걸로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다행이면서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발언할 차례가 왔다. 미리 메모해 둔 나의 입장을 천천히 살폈다. 횡설수설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의 의견 중 몇몇 부분은 일방적인, 부당한 요구로 다가왔으며, 그걸 전달한 방식도 적절치 못하게 느껴졌다고 이야기했다. 괄호에 넣었던 상세한 나의 입장을 풀어내는 시간이었다. 내가 전하려 한 건 조금도 꾸미거나, 가리지 않은 내 솔직한 의견이었다. 업무에 대한 것이었고, 파트너십에 대한 것이었으며, 늘 그렇듯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상대가 한 실수도 많은 부분이 감정에 대한 것이었고, 그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나도 감정에 대한 부분도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내가 말했다는 건 누군가 들었다는 것이다.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의 진실을 가만히 들었다. 회의 시작부터 우리 모두에게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을 때 내게 말하지 못한 진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때때로 쉬어 가기도 하고, 목소리가 떨리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했지만, 적당히 숨기거나 미사여구를 달지 않았다. 두려웠지만 멈추지는 않았고, 적당히 타협하지도 않았다. 진실을 충분히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고, 숨통을 조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두렵고 무섭더라도, 함께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믿으며 조금 더, 조금 더 나를 내몰았다.
To lose the power of confrontation is to lose the power of unity.
대립할 힘을 잃는 것은 유대할 힘을 잃는 것과도 같다. - 책 <그린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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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카드 아저씨인가?’
카드를 배송해 주시는 아저씨 전화를 번번이 놓쳤다가 최근 크게 한 번 혼이(아직도 억울하다.) 났던 지라, 전화가 오면 작은 두려움이 일어나는 걸 느낀다. 내 하루를 마음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로 묘사한다면 두려움과 두려움 사이를 갈지자로 걷는 모양일 것이다.
소중한 관계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그저 그런 관계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나는 왜인지 그런 것도 두려워한다.), 소속된 곳에서 쫓겨날 것에 대한 두려움. 거절과 배제에 대한 두려움. 평가에 대한 두려움. 인정받지 못할까, 아니 비난받고 평가받을까 두려움. 생계 수단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아끼는 이곳이, 내가 아끼는 이 관계가 변화할까 봐 두려움. 진실을 말하는 일의 두려움. 또 다른 진실을 마주하는 일의 두려움.
지극히 사소한 두려움에 ‘이 정도쯤이야.’하고 콧방귀 뀌다 정신 차려보면, 거대한 두려움에 도망치는 나를 만난다.
그중에서도 진실, 특히 나의 진실을 말하는 일은 언제나 내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는 일은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진실을 내 속이 후련할 만큼 드러내 보이고 싶었지만,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쓰기가 시시하고 재미없었던 날들을 돌이켜보면, 그때는 겁이 많아 움츠러들었던 시기였다. 너무 둘러 이야기하다 보니 부분적 진실이었거나, 너무 흐린 진실이었거나, 애당초 진실이 아니었다. 지금도 종종 그런 느낌을 받곤 한다.
어떤 대목에서는 부모님이 걸리고, 때로는 매주 보는 회원들이, 누군가와의 관계가 마음에 걸렸다. 때로는 그냥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누가 볼까 봐.’ 단지 그뿐이었다. 읽히기 위한 글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 생각이 너무 급진적일까 봐, 누가 나를 틀렸다고 할까 봐, 진실을 표현하면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거나, 평가하거나, 오해할까 봐 두려워하는 줄 모르는 채로 두려워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쓰기의 중요한 목표가 된다면, 그렇게 써낸 글은 모두 버려도 좋을 것이다. 틀림없이 재미도, 감동도 없을 것이다. (그런 글들을 많이 써봐서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나의 진실’을 충분히 열어 보이지 않고 누군가와 친구 될 수 있는가. 반대로 ‘그의 진실'을 마주한 적 없이 그 사람과의 관계가 진정으로 도타워졌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친구가 되고 싶을 수는 있지만, 그와 진정한 친구가 된 적은 없다. 진실을 충분히 보이지 않고는 진정한 연결을 경험할 수 없었다. 연결되려면 진실을 보일 힘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진실을 내보이기를 쉽게 포기해 버려서는 안 된다.
두려워하면서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진실을 쓸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안전한 변두리에서 그저 그런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두려워하면서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진실을 꺼내둘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것도 말이 쉽지, 진실을 꺼낸다는 건 어마어마하게 두려운 일이다. 그때 그 두려움을 헤쳐 나갈 유일한 동기부여책은 연결이다. 결국은 내가 원하는 깊이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서다. 미래의 나에게 용기가 필요한 날이 온다면 말해주고 싶다. 진실을 내보이는 일이 아무리 두렵더라도 어찌 됐든 계속 꺼내보라고, 용기를 짜내라고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