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7호선에서 2호선으로 이어지는 대림역 환승 구간은 높고도 길다. 걸어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높은 에스컬레터에 몸을 실은 채,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무심히 훑던 중 한 중년 남성에게서 눈길이 멈추었다. 그는 통화중이고, 큰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동시에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몸을 떨며 괴로워하고 있다. 다 큰 어른이 그렇게까지 역동적인 몸짓과 얼굴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일은 흔치 않다. 무슨 일인 걸까. 어떤 통화일까?
에스컬레이터가 교차되어 흐르는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이유도 모르고 문득 ‘그가 회복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몇 년 전에도 무궁화호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등산복 차림의 한 중년 여성이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가 화장실 앞 복도에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구인지, 무슨 일인지 가늠조차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그때도 비슷한 마음을 느꼈더랬다. 너무 큰 일은 아니기를. 회복하실 수 있기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화장실에 들어가면서 마음 속으로는 그런 기도를 했다. 그 기도에는 내 작은 진심과 간절함이 담겨있었다.
내가 항상 그렇게 오지랖이 넓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보통은 정신없이 빼곡한 환승 구간에서 누군가를 골똘히 관찰하는 습관도 없다. 그런데 그 장면들이 내 마음에 이렇게까지 선연하게 마음에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생각컨대, 괴로움 자체 때문이었다기 보다는, 그렇게까지 ‘어른’인 사람들이, 인생의 중반부를 거뜬히 지나, 웬만한 일에는 그렇게까지 반응하지 않도록 단련되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른인 것도 잊고, 어른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도 잊고선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에 가까운 것 같다. 그렇기에 그 괴로움의 크기가 얼마나 일반적이지 않은 크기일지, 그렇다면 그들이 저 괴로움 끝에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에 대해 본능적으로 생각이 뻗치며 나는 아마도 함께 마음이 아팠던 것 같다-고 생각해본다.
삶을 뒤흔드는 그런 커다란 일격이 찾아온다면, 그 시기는 언제인 것이 그래도 다행인 것일까? 다행이라는 표현 자체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상으로, 그 어떤 일이 ‘언제' 일어나는가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좌우하는 것만은 틀림 없다고 생각한다.
같은 일이어도 젊은 시절에 겪었다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털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을 일을, 5-60대에 겪으면 속절 없이 무너질 수도 있다. 반대로 경험이 없고 어린 마음에는 세상에 나 혼자인 것처럼, 이것이 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막막하고 괴로울 수 있는 일이, 나이를 먹으면 결국은 다 흐르고 지나가는 일로 보일 수도 있다. 결국은 누군가가 어떤 일을 겪었는가도 중요하지만, 누군가가 어떤 일을, 그 사람의 어떤 생애주기에서 겪었는가를 함께 봐야만 우리는 그 사람이 겪은 일을 덜 납작히 바라볼 수 있는 것 같다.
내게도 있었다.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 겨우 비로소 오래 머무를 도시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황급히 짐을 싸 다음 행선지로 향해야 했던, 원치 않는 스탑오버에 고단하던 순간. 날벼락 같던 소식들. 그리 길게 살지도 않았는데 왜 힘든 일이 이렇게 연이어 찾아오는 걸까? 인생의 초콜릿 박스에 들어있는 초콜릿 중 어쨌거나 먹어치워야 할 쓴 초콜릿 개수가 정해져있는 거라면 이제부터 내 인생에는 단 초콜렛만 나와야 되는데, 더 쓴 초콜릿이 아직도 남아있는 건가 싶었던 순간들. 문득 그것들을 겪어내야 했던 내 인생의 젊고 어렸던 시절들을 함께 떠올려보게 된다. 내가 겪은 일들은 결코 쉽지도 만만치도 않았지만, 그래도 그 일들을 겪었던 그 순간에 나는 어렸고, 건강했고, 함께 울어줄 시간과 에너지 많은 함께 어리고 젊은 친구들이 있었다는 사실. 그러면 어떤 부분에서는.. ‘다행'이란 말이 조금은 어울릴 수도 있는 걸까? 잘은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과 그 일이 일어나는 시기가, 너무 잔혹하지는 않길 바래본다. 삶에서 찾아오는 일격 자체를 막을 방도는 없지만, 이겨낼 힘이 있는 만큼만의 충격이길. 이겨낼 자원이 주어지는 시기에 일어나는 일이기를.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기도에서 출발해,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로 마무리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