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들에는 저마다 기부자들의 추억과 사랑, 기념, 염원이 담긴 문장들이 적혀 있다. 어떤 벤치에는 슬픔이, 그 옆에는 희망찬 서약이, 또 다른 어떤 벤치에는 짙은 그리움이 새겨져 있다. 재치 있는 문장들도 빼놓을 수 없다.
Stephen R. “Not dead, he just loves plaques.”
스테판 R. "죽은 것 아님, 그저 동판을 사랑할 뿐."
R.D.J. I Love you very much and look forward to marrying you… But If we have a fight, you can always sleep here.
R.D.J. 많이 사랑하고, 우리의 결혼 생활이 기대돼. 혹시 우리가 싸우게 된다면.. 그날은 이 벤치에서 자.
1986년 이래 지금까지 약 7,000개 이상의 벤치가 입양되었다고 한다. 1,000만원이 넘는 돈을 벤치에 쓸 정도라면 모두 부자인 걸까? 싶었는데, 뉴욕 거주 15년차 지인의 말에 따르면 이 벤치에 자신의 문장을 새기기 위해 10년을 넘게 돈을 모으거나, 결혼식을 생략하는 대신 그 예산을 벤치 입양에 쓰는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과 노력으로 Adopt-A-Bench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돈보다도 그 돈과 수고로움을 들여서라도 새기고 남기고픈 인간의 마음 아니겠느냐고. 지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처음 이 꿈을 꾸었을 무렵 나는 열성적으로 센트럴파크의 벤치들에 새겨진 동판들을 찾아보곤 했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살펴보면, 어떤 시구보다 음악보다도 마음에 위로와 울림이 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마음인 것이다. 쓰는 이의 마음이 담긴 문장은, 기필코 읽는 이의 마음에도 파동을 일으킨다. 틈날 때마다 찾아보며 발견한 어떤 벤치는 나의 휴대폰 배경화면이 되었고, 어떤 벤치는 나를 웃거나 왈칵 울게 했다. 그렇게 먼 땅,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나의 꿈이 무럭무럭 자랐다.
감사하게도 어느 날 벤치를 입양할 기회를 갖게 된다면 어떤 문장을 남길지 곰곰이 고민하는 것도 이 꿈에 수반되는 재미다. 벤치의 동판에는 알파벳 기준 각 30자씩, 최대 4줄까지 새길 수 있다. 그 작은 동판에 남길 만한 것을 고민하는 일은, 당연하게도 결국 삶에서 특히 오래도록 기억하고 남기고픈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의미란 제한된 형식 안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법이다. 여전히 꿈이자 소망의 영역이기에 너무 심각하지는 않되 충분히 진지하게, 그 동판 안의 문구들을 상상하는 것이 나의 작은 장난이다.
그러다 얼마 전, 동판에 새기고픈 문장 하나를 비로소 정했다. 나의 엄마, 박은희 씨에 대한 문장이자 실제로 엄마가 나에게 건넨 한 마디이다. “은희는 강해유!” 자세히는 옮길 수 없지만 요즘 긴 터널을 꿋꿋히 걸어나오고 있는 엄마에게 내가 투박한 걱정을 쏟아내자, 엄마가 답장으로 보내온 문장이다.
물론 이 한 문장을 영어로 어떻게 잘 번역할 수 있을지가 여전히 남아있는 고민의 영역이긴 하지만(“I am strong!” 밖에는 생각이 안 난단 말이지..) 언젠가 센트럴파크의 벤치에 저 문장 하나와 엄마의 이름을 새기는 상상을 하면, 조금 더 살아갈 힘이 난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꼭 뉴욕행 비행기에 오르리라.
가을의 한적한 뉴욕 센트럴파크를 혼자서 고요히, 아주 천천히 거닐면서 수년간 틈틈이 저장해두었던 문장이 새겨진 벤치들을 찾아다니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다 문득 마주한 나의 벤치 앞에서 울컥 하는 내 모습까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