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에는 이런 집, 이런 차, 이런 통장 잔고, 이런 직업, 이런 옷. 그것이 객관적 성공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성공 기준은 수많은 기준 중에 더 많은 지지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주관적이고 압도적인 기준을 들이미는 사람 앞에서는 실패가 된다.
‘에이 김 사장, 차가 왜 이래. bmw 정도는 타야지.’
한 마디 하면 다음 날 달려가 bmw를 타보고 와야 하는 것이다. 사실 나한테 차는 모두 바퀴 달린 이동 수단일 뿐인데 말이다. 어디 모임에 갔다가 다른 엄마의 자식 자랑에 기분이 심드렁해져서, 그 사람과 자기 자식을 비교하며 나는 실패한 엄마라는 착각에 빠진다. 아이를 키우면서 소신껏 지켜낸 자질, 아이의 가장 큰 장점 같은 것은 깨끗이 잊히고, 몇날며칠을 괴로워한다. 타인이 인정해주는 성공 기준에만 너무 기대다보면 누군가의 또다른 잣대에 들어맞지 않을 때 휘청이게 된다.
나의 기준이 필요한 건 수많은 욕망들 사이에서 폭신한 마시멜로우처럼 쉽게 무너져내려서다. 남들이 좋은 차를 타면 나도 이 정도 좋은 차는 타야겠고, 이 정도 집에는 살아야겠고, 가방도 이 정도는 들어야겠고. 해야할 것이 점점 늘어난다. 이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으니 불행해진다. 그리고 자주 혼란스럽다. 이것이 나의 욕망이 맞는가 말이다. 내 부모의 욕망인지, 내 연인의 욕망인지,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다보니 나에게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적 욕망인지 헷갈린다.
그럴 때는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을 선명하게 찰칵 찍어보는 것이 어떨까. 짜치는(?) 모습이라도 괜찮다. 솔직한 게 최고다. 아침에는 느긋하게 일어날 수 있고, 커피 한 잔 내려 마실 수 있고, 강아지와 시멘트 길이 아닌 흙길에서 산책할 수 있는 삶. 그런 삶을 원한다면 새벽같이 출근해야 하는 일과 회사에서 가까이 사느라 선택한 주상복합 아파트는 그다지 추구할 만한 것이 못된다. 남들이 아무리 들어가고 싶은 직장이라도 내가 원하는 삶과 너무 멀어지게 되고, 주상복합 아파트는 강아지와 함께 살기에는 꽤 힘든 환경일테니.
내가 원하는 삶을 명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만큼 분명해지면 그걸 기준 삼으면 된다. 심플하다. 그 삶과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면 잘 살고 있는 것이고, 그 삶과 멀어지면 균형이 깨진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과 멀어지면 본능적으로 감흥이 떨어지고 사는 게 지루하고 힘겹지 않나. 반대로 내가 원하는 삶과 가까워지면 몸이 좀 힘들더라도 행복하다. 원하는 삶의 모습이 북극성이 되어준다.
이 기준을 매일의 선택에서 똑같이 적용하면 후회할 결정을 덜하게 된다. 이걸 살까 말까 할 때 단순히 ‘이게 정말 내게 필요한가?’라고 묻지 않고(필요는 상대적이다)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나?’하고 물어본다. 그 질문을 통해서 때로는 1만원짜리 컵은 사치이고, 100만원짜리 강아지 훈련 클래스는 제대로 된 소비가 되기도 한다. 나의 선택을 공격하거나 가치있게 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내가 어마어마하게 만족하니까. 그럼 됐지.
기준은 업데이트된다. 경험이 보태어지면서 달라지고 깊어지고 선명해진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져보니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 때도 많다. 나는 기업을 일궈 세상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싶은 줄 알았는데, 시간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고,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 요리한 음식을 먹일 수 있고, 직접 클라이언트를 일대일로 만날 수 있는 삶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어쨌든 한 때 나는 ‘회사를 어디까지 키울 수 있나’에 혈안되어 있었고 그게 어떤 삶인지 맛봤기 때문에 나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니 소득이다.
나의 기준이 물렁했을 때는 타인의 기준이 나를 시도 때도 없이 침범했지만, 나름대로의 기준이 생기고 난 후에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기준을 훨씬 주의깊게 살피게 된다. 자신의 기준과 소신이 단단한 사람들에게는 존경심이 일고, 비슷한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엄청난 내적 친밀감을 느낀다. 어떤 기준을 두면 저런 삶을 살게 될까? 가끔은 너무 궁금해서 찾아가 대화를 나눠보고 싶을 때도 있다. 오늘은 당신의 기준을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