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풀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이틀 뒤 반가운 손님들이 오시는데 그 자리에 와줄 수 있는지, 그곳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눠줄 수 있는지 초대장을 건네주셨다. 선생님들과 한 번 더 생의 순간을 포개는 일이니 기꺼이 승낙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틀 만에 이야기를 준비해야 하는 빠듯한 일정과 글이 아닌 ‘말’로 삶을 나눈다는 것은 유난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 고민이 깊어졌다. 우리는 삶을 나눈다. 글, 영상, 말… 다양한 매개를 활용해서. 어째서 생업도 아닌데 삶을 나누는 일을 꾸준히 하고 있는 걸까. 이에 대한 답은 북유럽을 여행하고 있을 때 찾아왔다. 북유럽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은 나에게 평범하지 않았다. 놀이터에서 아이를 돌보는 어른의 대부분이 남성인 풍경이, 보행자를 절대적으로 우선시하는 교통질서가, 차보다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코펜하겐의 출퇴근길이, 스포츠 브라만 입고 구슬땀을 흘리며 거친 산을 오르는 노르웨이 여성들이, 그리고 처음 만난 사이어도 서로를 신뢰하고 친절할 수 있는 일상이 나에게는 오래 기다려온 대답이었다. 내가 사는 세상에는 들어맞지 않던 퍼즐 조각이 또 다른 곳에서 꼭 맞아떨어질 때의 기쁨,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던 삶의 가능성들이 어느 누군가의 삶에서 평범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걸 볼 때 느껴지는 희망! 여행을 하면서 우리의 평범한 삶의 조각들도 누군가에게는 오래 기다려온 대답, 또는 기쁨과 희망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거미줄처럼 조밀하게 연결된 세상에서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연히 나누는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 있었다. 원제 스님은 삶에는 수많은 역할들이 주어지고 사람은 그에 알맞은 노릇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의 삶에 ‘단순한 진심’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후 6년간 삶을 나눠왔지만 나는 내가 어떤 노릇을 하며 살아왔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저녁 7시, 이야기를 나누기로 예정된 시간이었다. 카페에 손님들이 온 건 밤 9시, 그들은 이 더위에 새벽부터 고된 산행을 하고 밤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풀 선생님은 다 같이 모여 앉았을 때 우리를 소개해 주셨고 우리의 이야기를 깜짝 선물로 준비하셨다고 기쁘게 말씀하셨다. 이 자리에 대해 모두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나는 퍽 당황했고 그제야 손님들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들 많이 피곤해 보였고 누구의 이야기를 들을 힘이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이야기하는 자리를 다음날 아침으로 미루면 좋겠다고 제안하고는 헤어졌다. 다시 30분 동안 차를 타고 시내로 돌아와 모텔에 짐을 풀었고 어디에선가 큰 허기가 몰려와 바나나와 삶은 달걀을 입에 쑤셔 넣었다. 나는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울적하고 막막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만족스러운 선물을 주고받기란 어려운 일이다. 받는 사람에게 필요하지 않은 선물이라면 주는 사람은 뿌듯하지만 선물은 번거롭고 귀찮은 존재가 되기 일쑤다. 아무리 좋은 선물이라 한들 정작 받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면 선물이 어떤 기쁨이 될 수 있을까?
그날 저녁, 선생님들의 터전으로 들어가기 전, 시내에서 간단하게 토스트를 먹기로 했다. 토스트를 받은 순간, 선생님께서 집밥을 해주시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 토스트를 어찌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네 명의 어린이들이 가게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여덟 아홉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둘, 남자아이 둘이었다. 한 남자아이가 토스트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토스트 냄새를 맡더니 “누구 나 토스트 사줄 사람~” 하는 것이었다. 현우는 느닷없이 아이들에게 이 토스트를 주자고 했다. 나는 요즘 세상에 낯선 어른이 주는 음식을 아이들이 받을 리 없다며 오히려 괜한 오해를 만들 것 같아 망설였다. 하지만 현우는 개의치 않고 “싫다고 하면 안 주면 그만이지”라며 주자고 했고 나는 걱정이 되었지만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현우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너희 토스트 먹을래?”라고 말을 걸었고, 아이들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짝이는 눈으로 귀엽게 올려다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했다. “녜녜! 조아여!!!”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이들은 경계하지도 않고 “아싸~” 하며 무척 신나했다. 아이들은 떠나는 우리의 등에 대고 입을 모아 “감사합니다!!!” 하고 합창하듯 소리쳤고, 우리도 손을 흔들면서 “안녕~” 하며 활짝 웃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이들에게 말했다. ‘기쁘게 받아줘서 내가 더 고마워.’ 서로 기쁜 선물이란 이런 게 아닐까? 그날 밤, 잠에 들기 전 생각 했다. 우리의 이야기가 과연 선물이 될 수 있을까?
다음날 아침, 택시를 타고 카페로 가는 길, 내 얼굴은 울상이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삶 이야기를 꾸밈없이 말한다는 게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실감했다. 택시 기사님은 창문을 활짝 열고는 “향기를 맡아봐요.”라고 하셨다. 아카시아꽃향기였다. 강릉은 이미 다 지고 사라진 아카시아꽃이 평창에는 한창이었다. 달콤한 내음이 택시에 한가득 흘러넘쳤다. 이토록 낭만적인 길에서 싱긋, 웃지도 못하고 있다니.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카페에 도착하니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난 손님들의 표정이 활짝 피어있었다. 조금 안심했지만 여전히 마음은 무겁고 긴장됐다. 커피를 마시며 준비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와 현우가 만난 9년 전부터 지금까지 각자의 삶이, 그리고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회고했다. 손님들은 한 선생님과 제자분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인데,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이야기를 단어 하나하나 꼼꼼하게 들으시며 코멘트를 하셨다. 아마도 제자분들과 공부하는 자리에서도 이렇게 활발하게 토론하며 대화를 하는 듯했다. 선생님은 ‘삶을 나눕니다’라는 말을 들으시고는 우리에게 물었다. “그냥 조용히 내가 좋은 대로 살면 되지, 왜 굳이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는지 궁금해요. 사람들이 삶의 향기를 맡고 다가오면 되는데, 마치 사명감을 가진 듯 나서서 말할 필요까지 있을까요? 혹시 마음속에 ‘나도 이쪽으로 출세했어!’를 알리려는 자신감 같은 게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해요.” 그에 대해 현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길에 있어서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걸 알면 다른 방향을 선택하거나 방향을 비틀 시도를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회는 주된 삶의 길이 뚜렷한 편이다 보니 다른 삶을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도 많이 적은 것 같아요. 20대 초반의 저를 생각하면 책이나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해방감과 용기를 많이 얻었는데, 다른 삶의 가능성이 제게 준 좋은 영향을 저 역시도 나누고 싶었어요.” 현우는 명료하게 잘 말했지만 나는 선생님의 말이 푹, 찔린 것처럼 아팠다. 왜냐하면 나도 선생님의 의문을 늘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나눈다고 할 때, 이야기되는 삶은 전체가 아닌 부분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나는 점-사건들을 선별하고, 그 점-사건들을 선으로 이어 특정한 그림-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야기에는 선별과 재구성이 필연적이고 나는 그 이야기를 글 또는 영상으로 사람들에게 나눈다. 자연히 인상적인 사건들이 선별되고 나의 언어로 풀어낼 수 있을 만큼 생각이 매듭지어진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일상에 불쑥불쑥 침투하는 질투나 짜증, 권태와 무기력은 이야기가 될 만한 사건이 보태지지 않는 이상 일기장에 짧게 기록될 따름이다. 그렇다 보니 그동안 올린 블로그 글이나 유튜브 영상 목록을 보면 그곳에 펼쳐진 세계가 나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나의 삶을 온전히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실제 나의 삶보다 더 산뜻하고, 차분하고, 성숙한 자아가 돋보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누군가가 나의 삶을 긍정적으로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었을까? 선생님의 말대로 과시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걸까? 그동안 내 삶이 가치 있다고 떠들고 다녔던 걸까? 내 인생의 역사 따위를 말하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댐이 무너지듯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오려 했다.
몇 년 전 수행자처럼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나눌 때는 그 단조로운 시절이 좋았는지 안 좋았는지 묻기도 하셨다. 나는 식생활이나 관계, 생활 패턴에서 몸과 마음의 소리를 듣기보다는 ‘옳다’고 느끼는 바를 추구했기에 몸이 망가지기도 하고, 주변 사람에게 무관심해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나에게 중요한 물건까지 싹 비워내서 후회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으로 가본 경험 덕분에 이제는 ‘이건 아니구나’ 하는 걸 몸소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 시절의 부단한 시도 덕분에 내면의 어수선함을 비워내고, 평온함에 이르는 법을 알게 되었고, 그 시절의 시행착오가 단단한 바탕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기에 단순히 그 시절이 좋았다 혹은 아니었다,라고 딱 잘라 말할 순 없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주어진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기 때문에 궁금한 점을 바로바로 솔직하게 물어보는 거라고 하셨지만 나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마다 ‘정말 그런 건지 아닌지’ 질문에 대답하고 종국에는 선생님의 언어로 나의 삶이 해석되는 현장이 점점 버거워졌다. 나는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궁금한 걸 다 물어보지 않는다. 상대방의 말에 미처 표현되지 않은 이야기, 공백이 있다 해도 지금은 표현하고 싶지 않을 수 있으니 그대로 내버려둔다. 당장 그 공백은 내 오해로 채워질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그가 표현하지 않은 이야기는 보다 긴 시간 조심스럽게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대화에 임해 왔다.
이야기를 나눠달라는 요청을 받고 삶의 덩어리들을 언어로 풀어내는 준비를 하면서 나의 약하고 여린 부분들이 삶의 방향성을 만들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강점을 따라 선택하기보다는 약하고 여린 부분이 다치지 않게 하는 길로 향한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어떻게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어요?’라고 물을 때마다 내가 자주 인용한 문장은 일본 드라마의 제목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였다. 따라서 삶의 이야기를 말과 글로 나누려고 할 때, 나의 약하거나 논란이 될 만한 점을 숨기려고 하기보다는 솔직하게 드러내곤 했다. 그건 마치 나의 숨구멍을 훤히 드러내는 것과도 같아서 마음만 먹는다면 누군들 쉽게 숨구멍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숨구멍에 귀를 가까이 대고 숨이 드나드는 여린 소리를 가만히 들어주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었다.
준비한 이야기가 더 남아있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고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지 않아서 마무리 짓기로 했다. 판단되고 평가받고 소비되기 위해 삶 이야기를 나눠 온 것이 아니었다. 이야기에 따르는 반응은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늘 특정한 반응에 취약하다. 삶에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이 어디 있을까. 모두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그렇게 살아온 것일 텐데. '단순한 진심’이란 이름으로 삶을 나눈 이래로 우리 삶이 절대적으로 ‘좋다’고, 또는 ‘옳다’고 말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누군가의 행복한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듯이 우리에게 ‘좋은 기분’을 주었던 예쁘고 소중한 삶의 조각들을 나누고 싶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풀 선생님은 내게 다가와 소나무 숲에서 조용히 머물다 오라고 하셨다. 말을 많이 했을 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나는 말 없는 소나무들 사이를 몇 바퀴 돌고서는 바윗돌에 앉았다. 저 멀리 하늘과 산을 바라보면서 참아왔던 눈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몸이 들썩거리도록, 숨이 차도록 실컷 울었다. 얼마 만에 그렇게 오열을 한 건지 다 쏟아내고 나니 탈진한 듯 기운이 없고 팅팅 부은 눈은 자꾸만 감겼다. 현우는 어제 썼던 현수막을 가져오더니 소나무 숲 한가운데 펼치고는 여기에 눕자고 했다. 몸을 감싸는 폭신한 흙의 촉감이 좋았다. 바람은 시원하고 보드라웠다. 자장-자장-우리-아가 하듯 조용히 토닥여주는 것 같았다. 스르르 눈이 감기고 코를 골며 30분을 푹 잤다.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소나무의 품 안에 있었다. 소나무가 어떤 치유의 기운을 불어넣어 준 건지 깜빡 잠들었을 뿐인데 몸도 마음도 꽤 상쾌해졌다. 부르릉,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려 카페로 돌아가니 손님들이 막 떠났다고 했다. 마지막 인사를 못한 게 아쉬우면서도 더 이상 아무것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 아쉽지 않기도 했다.
그날 저녁, 강릉 집으로 돌아왔다. 1박 2일 동안 마음의 에너지를 다 써버렸는지 무엇을 더 하지 못하고 긴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과 그다음 날, 카페에 가서 오랫동안 일기를 썼다. 내가 겪은 마음의 요동이 망각으로 사라지기 전에, 그러려니 휙 넘겨버리고 마는 무심함을 이겨내고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마음이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어느 누구도 나만큼 알아줄 수 없으니까 몸이든 마음이든 어디가 아프다면 최선을 다해 아픔을 알아봐 주고, 갖은 노력을 다해 치유해 줘야 한다. 나는 워낙 감정에 취약한 사람이라 아픈 마음을 돌보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쟁여두고 있는데 그중 가장 믿음직한 방법은 ‘잊히기 전 전부 일기장에 기록하기’다.
일기장에 와르르 쏟아낸 뒤 천천히 다시 읽어보며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하며. 일기장을 읽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내 곁에 있는 현우가 보였다. 그에게는 더 이상 들키고 싶지 않은 모습이 없다. 그런 게 있다 해도 늘 내 곁에 있기에 모든 걸 들킬 수밖에 없다.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은데 내가 울 때면 항상 그가 옆에 있다. 그는 울고 있는 내게 달콤한 말을 해주지도, 큰소리치며 내 편이 되어주지도 않는다. 다만 묵묵히 옆에서 눈물을 봐준다. 소나무 숲의 바람처럼, 폭신한 흙처럼 조용히, 한결같이, 따뜻하게. 집으로 돌아와 유쾌한 현우와 다시 안온하고 소중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자니 내 안의 무겁고 축축한 구석이 바삭하게 환해진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학년이 높아질수록 세상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냉정하고 쓰라렸다. 나는 이따금 집에 돌아와 불 꺼진 오후의 방에서 너른 엄마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곤 했다. 엄마의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가는 동안 마음의 상처는 아물어갔다. 늦은 오후의 온기와 엄마 품의 향기가 포근히 감싸준 날에는 저녁밥이 그렇게 맛있었다.
며칠 뒤, 선생님은 전화로 내 마음을 담백하게 토닥여주셨다. 선생님 앞에서는 괜찮은 척했는데 어쩌면 투명하게 드러났는 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찾아오는 예상치 못한 상처를 피할 수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부드럽고 조용하고 따뜻하고 사려 깊은 다정을 곁에 잔뜩 두고 그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상처는 안개 같아서, 안개에 너른 초원이 가려져 잊히기 십상이다. 하지만 안개가 걷히고,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고, 환한 햇살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초원에서 조용한 것들의 다정한 위로를 받으며 춤추듯 뛰어놀면 되는 일이다. 그럼 꺾이기보단 구부러질 수 있고 깨지기보단 찌그러질 수 있다. 구부러지고 찌그러지면, 정성껏 피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