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21 (종일 가을비) @정커피
모두가 자고 있는 이 시간, 가장 귀하고 소중한 이 시간. 무려 명절에 나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니 감개무량하다. 결혼 후 명절은 보다 숨 가빠졌다. 배우자의 가족이 나의 또 다른 가족이 되었기에 나는 그 가족의 오랜 역사와 질서를 암호를 해독하듯 바짝 따라가야 한다. 내 세계 속 어른의 전형은 엄마와 아빠였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엄마, 아빠가 한 사람씩 늘었고, 그녀는 내가 아는 엄마와 달랐고 그는 내가 아는 아빠와 달랐다. 같은 언어로 부르는 다른 두 사람, 나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추석(秋夕)이란 단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불볕더위가 끓는 여름이었다. 배우자의 가족과 이틀간 꼭 붙어 시골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시시때때로 맥없이 잠에 들었다. 일기 한 줄조차 쓰지 못할 정도로. 평소 사람을 잘 만나지 않고 둘만의 우주에서 고요히 공전하다가 갑작스럽게 다가온 많은 인물과 사건들에 미약한 심신이 깜짝 놀랐다. 별일이 좀 있었다. 밭에 쪼그려 앉아 고구마를 캐던 아침, 벌이 유일하게 긴 바지를 입고 있던 나의 다리만 6번 물었고, 팔과 목까지 야무지게 쏘고 갔다. 밭일을 끝내고 간지러워 벅벅 긁다 보니 물린 자리가 심상치 않게 딱딱해지면서 뜨겁게 부풀어 올랐다. 주목받고 싶진 않았기에 그 다리로 가족들과 긴 숲길을 산책하고 계곡에서 수영도 하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보며 시간을 꽉 채웠다. 그들과 헤어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 타자마자 며칠 밤새운 사람처럼 한 번도 깨지 않고 곤히 잠으로 가라앉았다. 늦은 저녁, '친정'이라 부르는 집에 들어섰다. 3살 때부터 줄곧 살아온 고향 같은 집이지만 이제는 이곳도 둘이 사는 강릉 집보다는 덜 편안하다. 독립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나의 흔적, 내가 있을 자리들이 서서히 사라졌기 때문일 테다. 그럼에도 친정은 지친 몸을 눕히고 싶으면 그냥 눕고, 얼굴 근육을 애써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어떤 신호를 파악하거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온 감각과 뇌를 쥐어짜는 노력을 포기해도 괜찮으며,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언어를 급하게 반죽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엄마가 정성스레 차려준 비빔밥을 먹고 일찍 누웠지만 벌에 물린 자국이 사그라들기는커녕 점점 더 간지럽고 뜨겁고 아파와 꼬박 밤을 새우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산소에 가지 않고 병원에 가서 주사를 두 방 맞고 약을 지어왔다. 그리고는 그저 가만히 그리고 조용히 있을 수 있는 책방으로 향했다. 꼬박 4시간을 머무르며 한 무더기의 일기를 쓰고, 책에 고개를 파묻고 무해한 문장들을 탐닉하고서야 바닥난 에너지를 겨우 충전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시간에 내 곁에는 나의 배우자, 현우가 있었다.
결혼한 우리는 이제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을 수 있다. 아니,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둘이 함께 있지 않으면 어김없이 의아한 표정과 질문을 받으니까. 이전에는 나와 관련된 일, 현우와 관련된 일로 나뉘던 것이 이젠 우리의 일이 되었다. 결혼을 함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의 보편적인 퍼즐 한 조각이 되었고 그로 인해 삶의 어떤 부분이 한층 수월해졌다. 예컨대 '부부'라고 설명하면 타인들은 우리를 단숨에 이해했다. 무엇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들은 왜 우리가 함께 사는지 더 이상 묻지 않고 잘 알겠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그러나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에는 우리 관계의 고유성과 우리 두 사람의 특유한 개성이 있었다.
굳이 꼭 할 필요 없다고도 생각했지만 우리가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어른들의 말에도 딱히 이견이 없어 소박하게 결혼식을 올린 순간부터 나와 현우는 서로의 가족에 속하게 되었다. 단순히 이름 석 자만 갖고 들어간 게 아니라 며느리, 사위라는 역할과 함께 들어갔다. 결혼에 따르는 수많은 관계들이 고구마 줄기에 달린 고구마들처럼 줄줄이 딸려 왔고, 현우의 배우자로 시작한 관계의 첫 단추를 어떻게 끼워야 할지 두려웠고 막막했다. 내가 그동안 관계를 맺어온 방식은 폐쇄적이었다. 내가 허락한 영역에 어울리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그 자리에 들어온 몇몇의 사람들과 살뜰히 관계를 맺으며 이 정도의 관계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럽고, 충분히 힘이 든다고 생각했다. 낯선 이가 문을 두드려도 내 비좁고 특수한 세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면 쉽사리 유연하게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왔으나, 결혼은 낯선 사람들을 줄줄이 데려오더니 이들은 낯선 사람이 아니라 평생 함께 할 '가족'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수월하게 관계를 맺는 방법은 알려주지도 않고 무심히 떠났다.
외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문간에 서 있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라면 최소한 '나답고 진실하게' 관계 맺고 싶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고 존중받고 싶다. 결혼을 하고 2년이 되어가는 동안 몇 차례의 시도들을 해보았다. 그 시도들에는 나다움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솔직한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고 (그래서 충격과 상처를 주었고), 평소의 나답게 통 연락을 하지도 특별히 선물을 보내지도 애교 섞인 말이나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다움을 포기하지 않아야 언젠가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나다움을 포기하지 않은 '덕분'이 아니라 나다움을 내려놓지 못한 '탓'에 아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살다 보면 서로의 세계에 한 발짝도 들어서지 못하고 영원히 낯선 이방인으로 문간에 멀뚱멀뚱 서있다 한순간 생이 끝나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서로를 낯설고 이상한 존재로 분별하지만, 조금만 떨어져 보면 결국 같은 행성에 촘촘히 모여 사는 동일한 종이다. 운이 좋으면 100년 남짓 살고 반드시 죽게 되고야 마는. 외계 존재가 아득히 먼 곳에서 지구에 사는 인간종을 보면 따개비 무리 정도로 보이지 않을까. 인간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뿐, 따개비들도 그들만의 세계에선 서로 다른 점을 물고 늘어져 지적하고 배척하고 경계하고 논쟁하고 미워하고 서운해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크나큰 파도가 따개비 무리를 휩쓸고 지나가면 그들은 우수수 흩어져 고요 속에 자취를 감출 것이다. 내게 지혜와 위안을 주는 광대한 우주로 시선을 옮겨본다. 당신은 현우를 내 세계로 들이면서 따라온 외면할 수없이 큰 행성, 당신에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현우의 손을 잡고 나타난 기묘한 행성 하나. 우리는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으나 하나의 궤도에 묶이게 되었다.
나다움을 내려놓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당신이 바뀌어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대신 내가 당신의 존재로 인해 바뀌는 것. 내가 살아보지 못한 당신의 세상에 얼마간 머무르며 크고 작은 충격을 받으며 새로운 질서를 익히고 내 세계에 당신의 질서와 자리를 마련해 보는 것. 나다움을 내려놓는 순간, 당신은 틀리지 않았고, 단지 내게 익숙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고유한 시작점이 있고 여정도 제각기 다르기에 각자만의 제한된 경험과 인식 속에 살아간다. 그리곤 결코 완전할 수 없는 나만의 기준과 유형을 만들어 사람을 판단하고 그것이 진실이라 믿는다. 내가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나의 부모도 누군가에겐 아니꼽고, 아무래도 싫은 사람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나다움'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져 쉽사리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모두가 고집 센 어른이 된 마당에 나다움을 내려놓고 내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 조금이라도 가능하기는 할까?
3박 4일간의 명절을 마무리하고 강릉으로 돌아온 밤, 입에 마구 쑤셔 넣은 고구마로 인해 속은 얹혔고 벌에 물린 다리는 여전히 불편하고 마음 깊이 출렁이는 우물에선 왈칵, 물 덩어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책상에 털썩 앉아 엄마가 건네준 편지를 읽었다. 그러고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하고 싶은 말 중 할 수 있는 말을 골라 했고, 엄마도 내게 해줄 수 있는 말들을 골라 응해 주었다. 90분 동안 주고받은 이야기에는 구멍이 송송 뚫려있었지만 나는 평온해졌다. 엄마는 수줍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현우가 참 예뻐 보였다고. 현우가 특별히 뭘 했는지 떠오르는 게 없어 뭐가 예쁘냐고 물었더니, 그냥... 잘 자는 것도 예쁘고 잘 먹는 것도 예쁘고 반찬 챙겨가는 것도 예쁘고 이불 위에 편안히 누워 추석 특선 영화 보는 것도 예뻐 보였단다. 현우에게 부족한 점이 어찌 없을까. 엄마는 나 어릴 적부터 미래의 사위는 넉살 좋고 애교 많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습관처럼 말했다. 그러나 현우는 그런 사위가 아니다. 그럼에도 엄마는 현우가 예쁘단다. 점점 더 좋아진단다. 현우는 엄마가 기대하고 기다리던 유형의 사람은 아니지만, 나로 인해 현우와 관계를 맺으면서 그를 예쁘게 보았고 그렇게 현우는 엄마에게 그냥 어여쁜 존재가 되었다. 엄마의 그 말에 맑은 빛이 어른거렸다.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필요한 건, 내가 어떤 사람을 기대하고 있었든 그것 따위는 잊어버리고 문간에 멀뚱멀뚱 서있는 낯선 존재의 예쁜 점만 쏙쏙 골라보며 무한히 예뻐할 수 있는 마음과 시선이라는, 맑고 단순한 답이 거기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