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6 (흐림) @오테오, 바질 토마토 에이드
손님을 대하는 공간을 열기로 마음먹었다. 오프라인 공간에 대한 소망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아무래도 볕이 따스한 날에는, 바람이 기분 좋게 부는 날에는 즉흥적으로 몸을 일으켜 숲을 누비는 즐거움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여는 것. 누가 올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손님을 기다리는 것. 오프라인 공간을 운영하는 우리의 모습을 ‘언젠가'하며 그려보다가도 결국 현실이 되지는 못했다. 작년 9월 북유럽 여행을 마치고, 여행에서 느끼고 배운 걸 바탕으로 북바인딩 브랜드를 리뉴얼해 보자고 결심했다. 어느덧 1년이 흐른 지금, 브랜드 이름도 새로 짓고, 지원 사업도 준비하고(다 떨어졌지만!), 수제 노트를 연구 개발하고, 수제 노트 쇼룸 겸 일기를 쓸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하기로 결심했다.
공간을 준비하며 유난히 공을 들인 건 공간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언어화’하는 일이었다. 공간을 운영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던 우리가, 많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도 심심하기는커녕 평화롭게 살아가던 우리가, 공간을 운영한다면 막연히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정도가 아니라 공간의 존재 이유와 필요성이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 확실해야 했다. 의미와 방향성이 사라지면 쉽게 공간을 놓아버릴 것임을 알기에,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뿌리를 단단히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몇 마디 문장을 위해 수백 페이지에 가까운 생각을 나누고, 의견을 대립시키며, 합의점에 이르고, 이를 바탕으로 정확한 단어를 골라 정의를 내리는 일의 연속이었다. 새로운 공간을 준비하시는 분들을 곁눈질해보면, 상가도 빠르게 계약하고 인테리어도 척척하며 몇 달만에 가게가 탄생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언어화하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내실을 다지고, 뿌리를 단단히 내리는 일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으니 조급한 마음이 종종 고개를 내밀기도 했다. 이런 마음을 하윤에게 내비치니 하윤은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10년은 이 일을 하기로 했잖아. 10년을 수월하게 일하기 위해 1년 동안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 그렇게 긴 건가?”
조급한 마음으로 일기에 쓰여진 주제는 ‘돈 걱정’이었다. 북바인딩 브랜드를 시작할 때도, 작은 숙박 공간을 시작할 때도 우리는 투자금이랄 것도 없이 초라하게 창업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큰 돈을 쓰는 게 영 익숙치 않다. 그간 모아온 돈으로 발품을 팔아가며 신중히 고른 가구를 구입하고, 우리가 잘하지 못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전문가에게 작업을 요청드리기도 했다. 돈을 쓰는 게 익숙치 않다 보니 결제를 할 때마다,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볼 때마다 마음 한 켠에서 ‘이렇게 돈을 써도 괜찮은 걸까…?’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상가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의자는 수입 일정에 맞춰 미리 구입해야 했다. 의자를 판매하시는 사장님께서는 카페에서 많이 쓰는 저렴한 의자들도 많은데, 왜 이렇게 비싼 의자들만 고집하는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순간에는 답이 떠오르지 않아 말을 적당히 얼버무렸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우리는 비싼 걸 사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물건을 사고 싶었다. 디자인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만족스러워야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는데, 그런 기준으로 고른 물건들이 애석하게도 보통의 의자들보다는 훨씬 비쌀 뿐이었다. 공간을 운영해 본 적이 없는 우리는, 이왕 운영하기로 했다면 우리가 정말로 좋아하는 물건들로 공간을 채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고, 우리가 진심으로 좋아서 나누고 싶은 것들이 가득한 공간을 만들어야 우리와 결이 맞는 사람들이 찾아와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물론, 물건이 공간의 본질은 아니지만, 공간의 철학과 정신을 물성화한 것이 물건이기에 가벼이 고를 수는 없었다.
써야 할 돈을 쓰는 것이기에 주저 없이 결제하기는 했지만, 큰 돈을 쓸 때마다 일기에는 어김없이 돈에 대한 걱정을 썼다. 불안하고 두려운 건 아니지만, 마음 속에 걱정 덩어리가 작지만 분명하게 있었기에 외면하기보다는 마주했다. 쓴 만큼의 돈을 벌 수 있을까? 생활 여유 자금이 부족해지는 건 아닐까?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삶의 소소한 즐거움들이 줄어드는 건 아닐까? 분수에 맞지 않게 돈의 씀씀이가 너무 커지는 것은 아닐까? 동시에 내가 쓴 생각들을 보며 떠오르는 의문도 적었다. 꼭 쓴 만큼 벌어야 할까? 얼마큼의 여유 자금이 있으면 안심이 될까? 생활비가 부족하면 씀씀이를 줄이면 될 일이지 그것이 불행이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인가? 씀씀이가 커질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해 물건을 고르는 안목이 높아지고, 삶이 더 풍요로워지는 측면도 있지 않은가? 걱정을 해결하려는 마음보다는 어떠한 걱정이 있는지 살피고, 다른 방향의 생각을 해보는 마음으로 썼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짝꿍과 소비의 결이 비슷하다는 것에, 빚을 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감사함을 적었다.
남대천을 따라 밤 산책을 하며 일기 내용을 하윤에게 말해주니 하윤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요, 돈은 돈이여~'라고 답했다.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하윤에게 돈은 ‘게임머니'에 가깝다. 현실 감각이 없다고도 볼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돈에 대한 애증의 태도가 없는, 돈을 그저 교환 수단으로 보는 건강한 태도로 보인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누군가는 돈과 관련한 부정적인 경험 탓에 돈을 미워하기도 하고, 돈으로 누린 편안함과 즐거움에 돈을 치켜세우기도 한다. 각자의 경험, 생각, 감정을 돈에 투사하며 돈을 애증의 대상으로 만든다. 최근에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책 <놓아버림>을 읽으며 이런 구절을 만났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에 품은 것에만 영향을 받는다.’
나는 이를 돈에 대해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할수록 돈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면 상황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아지는 것처럼, 돈에 대해 다양한 감정을 투사할수록 오히려 돈을 제대로 다루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 하윤의 말마따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돈은 그저 돈이다. 우리는 이 생각을 ‘산산물물돈돈'이라 이름 붙였다.
물건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나 ‘잘 써줄 때’다. 자전거에 먼지만 쌓여가는 게 아니라 숲을 자유로이 누비며 달릴 때, 자전거를 참 잘 샀다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들을 카메라로 담을 때 사길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값이 비싸더라도 일상에서 그 물건을 만족스럽게 잘 써주고 있다면, 나에게 그 물건은 값이 아니라 만족감으로 기억된다. 반면에 비싼 물건이 아니더라도 방 한구석에서 쓰이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걸 볼 때면 마음이 편치 않다. 물건에서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은 물건의 값보다는 얼마나 잘 써주는지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돈도 마찬가지 아닐까. 물론 늘어나는 돈의 숫자는 불안보다는 안심을 주지만 어찌 되었건 새로운 일에 돈을 쓰지 않으면, 돈은 통장에서 쉬고 있을 뿐 만족을 주진 않는다. 돈에 대한 만족감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써주는지에 달려있다. 우리는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돈을 써야 할 때마다 ‘그건 너무 비싸잖아'하며 단념하기보다는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거라면 기꺼이 돈을 쓰자'고 너그러이 허락해 주고 있다. 자그마한 걱정 덩어리들이 마음 속에 떠오르지만, 일상에서 그 물건들을 즐겁고 기쁘게 쓰고 있노라면 사길 잘했다는 마음만 남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