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사 새옹지마. 살면서 꽤 자주 되뇌였던 말이지만, 동시에 이 말은 내게 어쩐지 늘 시니컬 하게 들렸다. 아끼며 길렀던 말이 도망친 후 아쉬운 기색 하나 없이 덤덤히 ‘괜찮다, 좋은 일이 될 지도 모른다' 라고 말하다니! (말이 알았다면 얼마나 서운했겠는가?) 심지어 그 말이 짝을 이뤄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 때도 기뻐하는 마을 사람들 옆에서 ‘이게 화가 될지 어찌 아는가?’ 산통 깨듯 말하는 노인을 떠올리다 보면 뭐랄까, 지혜로운 태도와는 조금 다르게 읽혔다. (혹시 그래서 심통난 말이 아들을 등에서 떨구어 버린 것은 아닐까?)
그 노인은 언제 진심으로 기뻐하며, 언제 진심으로 슬퍼하고 아쉬워한단 말인가. 우리가 아는 속담 이야기는 말을 타다 다친 아들이 전쟁에 나가지 않게 되어 목숨을 구한 것으로 마무리 되지만, 따라서 마치 그러한 태도가 앞을 내다보는 지혜였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레 매듭지어지고 말지만, 사실 삶을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괜찮은 걸까? 나는 이 말을 가져다쓰면서도 종종 생각했다.
무릇 인생이란 소풍 전날 잔뜩 들떠 기쁨과 기대를 함빡 느끼는 앤처럼, 오후 네 시부터 올 누군가에 대한 설렘으로 세 시부터 행복해지는 어린왕자의 여우 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소풍날 비가 와 계획이 틀어지면 아쉽고, 애타게 기다린 누군가가 오지 않는다면 실망은 배가 되겠지만, 그래도 매일을 그렇게 진심으로 기뻐하고 기대하고 슬퍼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새옹지마 노인의 태도에 대해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만나게 되었다.
올해 늦봄,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신 후 엄마는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완전히 혼자는 아니다, 11살 반야와 함께 살고 있다. 하지만 반야는 엄마가 아프거나 다쳤다고 내게 전화를 걸어줄 수는 없다. 결코 혼자가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혼자인 셈이다.) 한평생을 누군가의 딸로, 아내로, 엄마로 살던 박여사가 처음으로 오롯이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살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엄마는 할머니가 떠난 후 집을 조용히, 그러나 부지런히 정리해나갔다. 벽지를 새로 바르고, 낡은 가구들을 처분했으며 할머니가 버리지 못하게 해 창고에 몇 년째 묵혀있던 이불과 오래된 물건들을 버렸다. 집만 바뀌지 않았지, 집을 뺀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아이보리톤 새 벽지에 집 분위기가 한층 환해졌고, 소파를 치우고 큰 테이블을 놓자 중심과 동선이 달라졌다. 나 역시 그 변화에 적극 동참하고자 많은 선물을 했다. 키가 큰 푸른 식물, 크고 선명한 화면이 송출되는 스마트 티브이. 티브이는 엄마의 새로운 ‘최애’ 가구가 된 편백나무 거실장 위에 놓였다. 화룡점정은 엄마가 늘 로망으로만 갖고 있던 식기 세트를 들인 것이었다. 엄마는 내가 태어날 무렵 부터 우리 집에 있었을 ‘코렐 그릇'부터 수십년 동안 하나둘 늘어난 그릇들을 대담하게 처분했다. 그러고선 아주 큰 마음을 먹고 오래 좋아하기만 했던 브랜드에서 식기 세트를 주문했다. 긴 시간 동안 한 귀퉁이가 접혀있던 엄마의 취향과 상상, 바람들을 이제는 오롯이 엄마만의 공간이 된 집 안에서 하나씩 펼쳐나가는 여정을 나는 누구보다 응원했다. 신난 엄마를 보는 내가 더 신이 났다.
그런데 동시에 한 켠으로는 이유 없이 조금 불안했다. ‘이렇게 좋기만 할 리가 없는데.’라든지, 우리가 모르는 불행이 어딘가 이 앞에 숨어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은은하게 마음 속을 맴돌았다.
그러고 얼마 후,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다.
엄마가 자꾸 불안을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수를 하다가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면, 할머니가 뒤에 서있을 것 같다고 했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던 어둑한 아침 새벽 산책이 어느 날부턴가 너무 무섭다고도. 엄마의 불안이 무서운 속도로 자라는 동안 나는 무력감을 느끼며 물었다. 왜지? 뭐가 문제였을까? 처음에는 부정하려고도 했다.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해!” 같은 이상한 말도 건넸다. 감기에 걸리듯 장염에 걸리듯 엄마가 아픈 것임을 알고,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다행히 우리 곁에는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의 도움으로 용기를 내어 찾은 병원에서 엄마는 초기 불안증 진단을 받았다.
초기라는 말과 달리 약은 많고 독했다. 그 약들을 먹자 불안은 좀 가라앉았으나 엄마가 잠을 제대로 못 자기 시작했다. 원래도 하루 네다섯 시간 남짓 자는 엄마가 한 시간도 채 통잠을 자지 못하자 내 불안과 걱정은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생업이 있기에 엄마 옆에 붙어 있을 수도 없고, 아침저녁 통화에서 들리는 엄마 목소리에서 온갖 신호를 감지해내느라 내 신경과 감각은 지나치게 팽팽해졌했다. 이제는 정말 편하고 좋을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라는 마음이 억울함과 예민한 신경질로 번져갔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거짓말 처럼, 불안과 불면을 운동으로 겨우 버텨내고 있던 엄마의 발가락이 부러진 것이다.
유산소 운동이 불면에 좋다는 말에 아주 가볍게 공원을 달리던 엄마가, (엄마 말에 따르면) ‘정말 그럴 것도 아닌’ 작은 홈에 발이 걸려 넘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부은 줄로만 알아 집까지 절뚝대며 걸어왔는데 다음날이 되자 발과 발목이 심각하게 부었고, 결국 찾은 병원에서 엄마는 발가락이 골절되었으니 붓기가 빠지는 대로 기브스를 하고 약 두 달 동안 운동을 금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붓기가 극심했던 첫 1-2주 동안 엄마는 바깥 출입조차 어려워 누워서만 지내야 했다.
하필 엄마 인생 처음으로 오롯이 자신을 위하고 아끼는 여정을 출발하는 시점에, 이 불행들이 날강도처럼 들이닥친 것이다. 나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엄마의 마음이 정말 어땠는지는 엄마만 아니까 내 마음에 대해서만 쓴다.) 대개는 믿기지가 않았고, 어느 날은 황당해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세상이 우리를 ‘억까'해도 되는 거야? 싶은 마음.
그런데 정말 생뚱맞게도, 어느 날 갑자기 새옹지마 노인의 모습이 머릿속에 비디오처럼 흘러나왔다. ‘괜찮다. 좋은 일이 될 지도 모른다.’ 물론 1초만에 다시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게 어떻게 좋은 일이 될 수가 있어. 드디어 미친 거야?’ 그러면서도 엄마에게 건네는 위로로는 제법 괜찮다는 생각에, 나는 틈만 나면 말했다. “엄마, 괜찮아. 인생사 새옹지마야.”
‘인생사 새옹지마'는 우리의 만트라가 되었다. 팽팽한 긴장과 불안 속에서도 희미하게 중심을 붙들어주는 한 마디.
다친 다리의 치료에 온 집중이 쏠려서인지, 기브스를 한 다리로 하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에너지를 많이 쏟아서인지 엄마는 어느 날부턴가 조금씩 깊이, 통잠을 자기 시작했다. 약을 깜빡하고 안 먹었는데 무사히 하루를 보내는 날도 많이 늘어났다. 그 조금의 통잠에, 무탈한 하루 하루에 엄마와 나는 정말 많이 감사함을 느꼈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도 더 많이 표현하게 되었다.
그동안 지나치게 길고 더웠던 여름이 끝내 지나갔다.
엄마도 나도 그만하면 잘 버텨냈고, 여름 동안 습관처럼 ‘인생사 새옹지마'를 외는 동안 상상 속 노인의 모습도 조금씩 입체적으로 변했다.
아끼던 말이 집을 나가자 두 손은 파르르 떨리고 목울대가 울컥거리는데도 애써 담담히 ‘저 신나는 곳으로 더 좋은 데 찾아 갔겠지' 하며 괜찮다- 하는 모습. 친구랑 함께 두 마리가 되어 다시 돌아온 말을 보며 마을 사람들이 ‘땡 잡았다' 하는데도, 반가운 마음 한 켠으론 ‘아니 저 말을 잃은 주인은 얼마나 놀라고 속상할까' 싶어 ‘예끼 너무 호들갑 떨지 말자' 하는 사려깊은 마음. 그런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인의 태도가 조금은 지혜로워 보이는 듯도 하다. (여전히 ‘지혜’가 가장 적절한 단어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확실히 알겠는 것 하나는, 노인은 자기 삶의 파고를 능숙히 다뤄낼 줄 아는 멋지고 단단한 선장이었으리라는 사실이다.
인생이라는 게 참,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