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 집과 단독주택을 1/3씩 나누어 쓴다. 세 집의 우편이 한데 모이는 우편함에는 각종 우편물이 한가득인데, 열에 아홉은 옆집 몫이다. 옆집 앞으로 온 전기세, 물세, 과태료 고지서가 수개월간 그대로 쌓여 있다. 다람쥐가 볼에 너무 많은 도토리를 숨겨서 하나라도 더 넣으면 다 쏟아져 나올 듯 빵빵한 것처럼, 우편이 하나라도 더 도착한다면 터져나갈 기세다.
처음 이 집을 보러 온 날, 우리는 계약 조건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집의 위치나 크기, 상태에 비해 조건이 훌륭했다.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뻥 뚫린 풍경을 보자마자 이 집이 내 집이다 싶었다. 당시 살던 집에서 곰팡이 문제로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집주인 할머니는 우리를 한 번 더 봐야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셨고, 그렇게 ‘2차 면접’에 들어가게 되었다.
할머니는 근심스러운 얼굴(이 얼굴이 4년 동안 유지되면서 오해가 해소되었다.)로 오렌지주스를 한 잔씩 내주시며,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월세는 낼 수 있는 건지), 라이프스타일은 어떤지, 이상한 사람들은 아닌지를 에둘러 물어보셨다.
“그럼, 계약서는 저희끼리 날짜 잡아서 쓰도록 해요.”
나오는 길, 집 주인 할머니의 면접을 통과했다는 사실에 쾌재를 불렀다. 부동산을 통해서 계약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임차인을 고르는 것. 이것이 집에 대한 애정인지, 절약 정신인지, 유별난 성격 탓인지 알지 못했다. 그때는 참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 ‘면접’이 할머니의 데이터베이스에 따른 현명한 절차였다는 것을. 앞으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알고 공유하게 될 터였다.
어느 날 밤 11시에 이삿짐을 실은 큰 차 한 대가 집앞에 도착했다. (우리는 전에 살던 임차인이 그날 이사를 나간 줄도 몰랐다.) 이삿짐을 옮기는 사람들을 보니 새로운 이웃의 친구들인 듯했다. 이사는 12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그게 첫 만남이었다.
내 방은 공동 현관문과 가까워서 오갈 때마다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방이다. 머지않아 나는 그의 배꼽시계를 알게 되었다. 새벽 서너 시. 그때쯤이면 아침밥인지 저녁밥인지 모를 배달 음식이 도착했다. 한두 달에 한 번쯤은 먼지떨이와 대걸레를 가방에 꽂은 아주머니가 집 마당 한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봤다. (요즘은 못 봤다.) 세탁을 대신해 주는 서비스의 바스켓이 언제부턴가 마당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나는 이 사회에서 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모든 일로부터 이토록 열심히 도망 다니는 사람은 살면서 처음 봤다.
그는 음악 하는 사람으로 집에서 음악 작업을 하는데 작업 시간에 대중이 없다. 마음이 내키면 낮에 작업을 하고(그런 날은 잘 없지만) 대개는 새벽에 작업을 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만드는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소리가 크게 들려서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는데, 이제는 그가 집에 녹음실을 만들어서 조심하며 음악을 한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소리가 들렸다. 알고 보니 층간소음으로 고통받았던 사람들은 특정 뇌 회로가 강화되어서 ‘귀트임’이라는 현상을 겪게 된다는 걸 알았다. 이제는 그가 음악을 크게 틀든 작게 틀든 바깥의 소리와 정확하게 분간할 수 있는 재주까지도 생겼다. 어떻게 작은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수 있을까? 놀라운 일이다.
그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니, 작년 겨울이었나.
“협조 좀 해주시죠.”
새벽 세 시에 어느 정도까지 자신이 볼륨을 틀면 옆집에 피해가 안 가는지 테스트를 해보기를 원한다며 그는 우리에게 ‘협조’할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협조’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소리가 안 들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수십번을 말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러다 한 6개월이 지나 그날이 온 것이다. 눈을 보고도 말해보고, 문자로도 말해보고, 집주인을 통해서 말해봐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영은은 한껏 열이 받아 있었다. 새벽 세시. 그의 배꼽 시계가 울릴 때즈음 경찰에 층간소음 신고를 했다. 10분 만에 출동한 경찰 아저씨가 옆집에 경고 조치를 하러 왔다. 그분과 함께 집 앞을 지나가는데 그는 분명히 TV를 보고 있었다고 했다.
“옆집에서 소음 신고가 들어와서 출동했습니다.”
“네? 저는 자고 있었는데요.”
그는 자고 있었다며 억울하다고 했다.
“자고 있었다는데요?”
그걸로 끝이었다. 음악이 아니라 이번에는 TV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억울했을 그는 그날부터 흑화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귀가 트여서(?) 안 들리던 보일러 소리까지 듣기 시작했고, 소리를 줄여달라고 요청한 날 중 하루는 그가 연주하지 않았던 날이었다. 그는 자신이 내지 않은 소리를 음악 소리로 오해받아 왔다는 생각에 빠져 도무지 우리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후로 이웃간 분위기는 점차 냉랭해졌다. 매일 지나다니는 마당이 미묘하게 덜 안전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아파트, 빌라에서 층간소음으로 인해 칼부림이 났다는 뉴스를 보면 칼을 들고 뛰어간 사람을 연민했다. 얼마나 대단했으면 칼을 들었겠는가!
2024년이 한 달밖에 안 남은 데다 4년간의 연희동 살이를 매듭짓는 지금, 황당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어쩌면 삶의 아주 작은 조각이었을 수도 있을 이 옆집 인간이 뜻하지 않게 2024년 내 삶의 대단한 일부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가까운 친구들은 나의 안부를 묻기도 전에 옆집 소식을 물어왔다. (그 둘이 어느 정도 연동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옆집 사람은 어떻게 됐어?”
“어떨 것 같아…. 똑같지, 뭐. 그 사람이 내 자비 수행 선생님이다.”
한 사람이 경험하는 사회는 좁고 구체적이다. 그것 하나는 그를 통해 확실하게 배웠다. 사회는 신문 사회 면이나 ‘이 사회는 이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알려주는 책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마주치는 이들의 표정, 말 한마디, 전봇대 앞에 버린 이웃의 쓰레기가 나의 사회였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건 별것 아닌 일에서다. 세상이 팍팍하게 느껴지는 것도 별것 아닌 일에서다. 그러니까 잠깐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게 지은 나의 표정은 중요하다. 내가 쓰레기를 버리는 방식은 중요하다.
그를 만난 이후의 나는 조금 덜 잘 자게 되었고 낮은 음역의 소리에 예민해졌고, 그가 하는 장르의 음악이 견딜 수 없이 싫어졌다. 동시에 그 외의 다른 낯선 이들에게 조금 더 친절해지고 부드러워졌다. 산책하며 마주치는, 나와는 아무 관계 없어 보이는 이들과 유대를 느꼈다. 그건 괜찮은 사회에 살고 싶다는 소망, 나도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책임감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는 예상 밖의 방식으로 많은 것들을 바꾸어두었다. 함께 산다는 건 그런 일인가 보다.
요며칠 조용하다 싶었는데, 어제는 집에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다급하게 노크를 했다.
“000 씨 집입니까. 형사입니다.”
“네? 여기가 아니라 옆집인데요.”
하루의 장르가 스릴러-과학수사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무슨 일일까. 정말로 별일이 아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