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일, 일출을 보기 위해 관악산을 올랐다. 5시쯤 집에서 나와 서울대학교 공학관 근처로 이동했다. 우리가 선택한 등산로는 관악산 연주대에 오르는 최단 코스였다. 집을 나설 때는 산에 누가 있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캄캄하고 추웠는데, 근처에 가자 차가 막힐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외국인들, 가족들, 유독 옷을 얇게 입은 10대 친구들도 있었다. 1월 1일에 일출을 보러 산에 가면서 고즈넉하길 기대하는 것도 순진한 발상이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다.
“거봐. 헤드랜턴 없어도 된댔지?” 산을 오르던 지만이가 뿌듯하다는 듯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헤드랜턴 없이는 한 발짝 내딛기도 어려울 만큼 어둡고 바닥은 얼음투성이였으나, 그 어둠을 밝히고도 남을 정도로 사람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헤드랜턴을 쓰고 있었기에 그 사이에 낀 우리는 별다른 조치 없이도 여차저차 산행할 수 있었다. 어둡고 조용한 산에, 사람들의 호흡과 발소리로 활기가 감돌았다.
나는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산을 오르는 감각을 좋아해서 기회가 될 때면 꾸준히 산을 찾는 편이다. 산을 다니며 배운, 산에서의 에티켓이 몇 가지 있는데 나는 이 예의범절을 착실하게 지키려 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좁은 길목에서 내려오는 사람과 올라가는 사람이 만났을 때는 한쪽이 반드시 양보하게 되는데, 이때 양보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감사합니다” 소리 내 인사를 하는 것이 좋다. 고개만 까딱- 하는 것으로는 어쩐지 좀 싱겁거니와 서운하다. 내가 힘에 부쳐 걸음이 느려진다 싶을 땐 뒤에 있는 사람에게 “먼저 가셔요” 하고 비켜주는 것이 좋다. 내려가는 길에서 앞사람이 조급함을 느끼지 않게 “천천히 가셔요. 천천히, 조심해서” 말해주는 것도 꼭 필요하다. 성격 급한 국가번호 +82의 민족이지만, 산에서만큼은 다들 조급함을 경계하고, 보다 너른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는 듯하다. 산을 아끼는 사람들일수록 그렇다. 좁은 길목을 서로 지나갈 땐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는데, 이건 예의라기 보다는 산을 더 잘 즐길 수 있는 작은 비결에 가깝다. 아스팔트 위 길거리에서 만났더라면 무뚝뚝한 얼굴로 지나쳐갔을 사람이 손에 연양갱을 덥석 건네주기도 하고, 여행 가서도 길을 잘 묻지 않던 우리가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사장님- 사장님- 정상 멀었어요?" 부러 묻기도 한다. 대개 돌아오는 답변의 데이터가 그리 정확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으레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 말과 마음들이, 참 정겹지 않은가.
연주대에 거의 도착했다. 전망대를 지나는데,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서 기도하는 어떤 아저씨를 보았다. 누구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자세로 간절히 소원을 비는 장년 남성을 본지가 너무나 오랜만이다. 문득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고3이 되었을 때, 아빠는 전국 명산을 돌아다니며 나를 위해 기도했다. 산을 워낙 좋아하고 잘 타서 엄마는 아빠를 산 다람쥐라고 불렀다. 아빠도 저런 모습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했을까? 산에 같이 가자면 질색팔색을 하던 열아홉 딸은 어느새 아빠 나이에 더 가까워지는 중이다.
연주대가 보인다. 감상에 깊이 빠질 새도 없이, 정상을 빼곡하게 메운 인파에 깜짝 놀랐다. 꽤 서둘렀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이 시간, 이곳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라니. 너무 쉽게 감상에 빠져드는 성격이 주책 같기도 하지만, 정상 바위 턱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추위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연주대 공기에 사람들의 뿌듯함, 설렘, 추위, 숨이 촘촘하게 다 섞여 있다.
다 큰 어른들이 아직도 새해를 핑계 삼아 어떤 기운과 에너지를 빌려보려 안 하던 일을 한다든가, 이번에는 달라져보자며 무언가를 마음먹는 것을 보는 일이 나는 좋다. 새해라고 무언가 다짐하고 계획하는 것이 조금은 촌스럽거나 어리석게 느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이 이유 모를 위안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결국 둥근 해를 보지 못했다. 해의 머리와 꼬리가 빼꼼히, 그러나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은 보았지만, 몸통이 구름에 딱 가렸기 때문에 해다운 해는 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참 좋았다. 캄캄한 새벽에 이불 밖 찬 공기로 발을 딛으며 ‘가지 말까?’ 하던 잠깐의 순간, 끝내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먹어 나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첫날에 내린 이 선택의 방향이, 관성이 되어 남은 한 해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를 인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힘을 내기가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지지 않고 움직이고 힘내보려는 몸짓들이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몸과 마음의 환기를 위해, 아끼는 누군가를 위해, 좋은 새출발을 위해. 각자의 이유로 새벽 일출 산행을 결심한 사람들에 대한 응원과 애정의 맘이 피어나는 것을 느낀다. 동쪽이 잘 보이는 자리를 찾아 다닥다닥 붙어있던 사람들, 서로 해가 이미 떴네! 아직 아니네. 토론하다가, 붉은 실 같은 게 처음 보이기 시작했을 때 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떴다! 떴어!’ 하던 사람들. 해는 보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많이 담았다.
두 손을 모아 눈을 감고 정성스럽게 무언가 기도하던 사람들. 그 틈에 섞여 나 역시 기도를 많이 했다. 서로 다른 목적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한 시공간에서 함께 기도하는 것은 언제 느껴도 신기하고 애틋한 감각이니까. 어쩐지 평소답지 않게 나와 내 가족뿐 아니라 더 넓은 대상을 위한 기도를 했다. 이런 세상에서 오직 나와 가족만을 위해 기도하기는 힘들다. 사람만이 아니라, 생명만이 아니라,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위해. 기도라는 건 참 신묘해서, 할수록 마음이 반질반질 해진다. 마음을 정성스럽게, 닦아내는 행위인 것이다.
가만히 기도를 읊조리다 눈을 뜨니, 어느새 한참 위로 간 해가 보인다. 매일 뜨는 해일 뿐인데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라는 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당연한 사실조차도 이렇게까지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 거구나.
잘 닦인 마음으로 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