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꽂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아무리 아름답게 꽂으려 애써도 자연이 꽂은 꽃만큼 아름답기는 어려웠지만, 꽃이 유리병에서 제자리를 찾을 때의 행복감은 그림을 그릴 때의 희열에 못지 않았다. 꽃꽂이를 배우면서 계절마다 새로운 꽃을 만나고, 꽃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찾고, 서로 다른 곡선과 색이 조화롭게 만나는 곳을 발견하는 재미를 알았다.
하루는 시든 꽃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나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한 번 싫어지고 나니 시든 꽃을 보는 것도, 치우는 것도 곤욕이어서, 몇 번은 시들다 못해 썩기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버렸고, 꽃이 시들기도 전에 쓰레기통에 버려도 봤다. 어차피 질 것을 굳이 또 들이는 것이 모두 부질없는 짓 같아 한동안 꽃을 찾지 않았다. 각별한 취미였던 꽃꽂이도 완전히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꽃 한송이를 선물받았다. 깃털 같이 얇은 꽃잎이 수없이 달린 연핑크빛의 작약이었다.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조바심에 꽃이 피고 지는 것을 틈 날 때마다 지켜봤다. 꽃잎이 조금씩 처지면서 아래로 살짝 일그러지는 모양, 누르스름하게 변해가는 색감이 더없이 멋스러웠다. 아직 피어나기 전부터 완전히 피어나 잎이 떨어질 때까지 그 시간 그 꽃에서만 찾을 수 있는 모습을 꼼꼼히 누렸다. 그리고 이별을 고했다. 아마도 이전의 끔찍한 기분은 사랑하는 것이 모두 변화한다는 데에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난 주 시장에서 개나리를 발견해 집안 곳곳에 꽂아놓았다. 덕분에 집에는 일찍이 노란 봄이 왔다가, 날이 따뜻해지면서 꽃이 지고 있었다. 바싹 마른 개나리 꽃 네 송이가 바닥을 뒹구는 것을 애틋하게 지켜보다, 문득 옛 친구들이 떠올랐다. 우리 넷은 오랜 친구답게 언제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어색하지 않았지만, 지난 몇 년간 어떤 새로운 변화가 있었는지를 나누기에는 할 이야기가 많이 밀려있었다. 그날 우리는 추억 속의 몇몇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고, 돌아오는 길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우리의 나무에도 넷 사이의 공통분모가 모두 떨어지고, 몇몇 추억이 가까스로 걸려있는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갑자기 친해진 우리는 매일 학교 마치면 양재역 버거킹 앞으로 펌프를 하러 갔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었는지,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분주하게 길을 나섰다. 아무도 우산이 없어 학교에서 나눠주는 신문을 머리 위에 받치고, 학교에서 몇 킬로 떨어진 양재역까지 걸었다. 넷 다 펌프에 그다지 재능이 없어서 몇 판 하지도 못했는데, 가진 돈이 똑 떨어졌다. 그렇게 집에 가기는 영 아쉬워서 비에 완전히 젖은 신발을 벗어던지고 신바람이 나서는 펌프 위에서 춤을 췄다.
“베스트 프렌즈 포에버!”
매일 매일 붙어지내던 날들이었다. 우리는 20대가 되면 집을 구해서 같이 살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집이 좋을까. 마루는 컸으면 좋겠고, 집은 복층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웃었다. 슬프게도 우리는 뿔뿔이 찢어졌다. 각기 다른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고, 나중에는 공교롭게도 지구 반대편에서 대학을 다녔다. 10대까지는 늘 모든 처음을 나누던 우리가 30대가 되면서 더이상 함께 할 처음이 별로 남지 않게 되었고, 그 사이에 원하는 삶의 모양도, 중요한 가치도, 좋아하는 취미마저도 천천히 달라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좋은 친구의 절대적 기준으로 남아있는 이 세 명과의 우정이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 건 조금 서글펐다.
이제는 시들어가는 개나리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싶어졌다. 시든 꽃을 대하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 것은 그때뿐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음미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이 생겨난 덕분이었다. 서로가 있어서 빛나는 십대를 보낼 수 있었던 것, 그때의 추억이 선명하게 남아서 소중히 안고 살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우리 넷이서만 알고 있는 서로의 꾸밈없는 모습들,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곁을 지켰던 나날들은 우리의 관계가 변하는 만큼 더 소중한 게 아닐까 해서. 예전만큼 붙어지내지 않더라도, 앞으로 우리 관계가 계속해서 달라지더라도 괜찮다. 개나리 덕분에 집에서 매일 봄을 누렸고, 개나리가 진 자리에는 연두빛 어린 잎들이 자라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