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선배는 출산한지 6개월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몸 컨디션에 불만을 토로했다. 양말을 신으려는데 한쪽 발을 지면에서 떼는 것이 어려워서 의자에 앉아 신으면서 내 몸이 정말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원래 나에게도 ‘코어’라는 것이 꽤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뭐든 그렇듯 그게 없어질 때까지는 그 고마움을 몰랐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배는 곧 회사 복귀를 앞두고 있었다. 잃어버린 코어를 되찾기 위해 몸의 회복을 위한 모든 활동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필라테스였다. 필라테스 선생님은 몸에 필요한 ‘기본적인’ 움직임을 연습시켰다. 그 기본이라는 게 선배에게는 너무 아득하다고 했다.
“필라테스를 하고 나면 오히려 자괴감이 든다고 했더니, ’회원님, 어떡하죠. 이게 제일 쉬운 동작이에요.’ 이러는 거예요.”
돌아가는 길에도 이 한 마디, ‘이게 제일 쉬운 동작이에요’라는 말이 귀에 맴돌았다. 그 말은 나를 길고 긴 운동 (실패)의 역사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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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내가 다니던 운동 센터는 조금 특이한 곳이었다. 센터에서 수업을 맡고 있는 선생님은 두 명이었는데, 두분 다 한때는 운동 선수였다. 센터에서는 보수 위에서 통통 뛰며 근력 운동을 하는 클래스, 요가 클래스 등 다양한 형태의 실험적인 수업이 제공됐다. 요가 선생님의 시퀀스는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태도는 정중했고, 충분한 컨디셔닝으로 필요한 움직임을 잘 가져갈 수 있도록 도왔다. 나도 선생님들의 에너지에 호응하듯 일주일에 3번씩 꾸준히 참여했다. 체크. 체크. 체크. 모든 체크박스가 완성됐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았다. 목은 계속 아팠고, 선생님은 내가 목을 붙들고 낑낑 거릴 때마다 ‘잘 쉬어야 합니다!’라고 하셨다. 정말 쉬지 못해서였을까.
돌이켜보면 레벨링의 문제였다. 원장 선생님이나 요가 선생님이나 한번도 보통 이하의 체력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보통 이하의 사람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레벨 1에 닿기 위해 무엇을 익혀야 하는지, 그러니까 더 낮은 레벨 0.1을 안내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 선생님의 수업은 그 수업을 소화할 수 있는 기본적인 훈련이 된 사람들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수업이었지만, 그 수업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준비된 시퀀스를 따라가기가 벅찼다. 다들 기진맥진해서는(기진맥진은 조금 순화한 단어같지만) 수업이 끝났다. 나는 어떻게든 따라해보려고 보상적인 움직임을 계속해서 사용했고, 결과적으로 그 수업에서 준비한 혜택을 충분히 얻기는커녕 통증은 더 심해지기 일쑤였다. ‘회원님, 어떡하죠. 이게 제일 쉬운 동작이에요.’와 같은 문제였다.
멤버들이 들쑥날쑥했는데, 계속 보이는 얼굴들은 그래도 운동을 조금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를테면 자신의 요가 매트와 도구를 갖고 다닐 정도로 이미 숙련된 사람들, 다른 운동을 하고 있어 체력적으로 기본이 되어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수업을 안내하는 책자에서는 '초보자, 왕초보' 같은 단어가 눈에 띄었다. 레벨의 미스매치였다.
결과적으로 내가 이 경험에서 얻은 건 반복적인 좌절과 자책이었다. '건강이 나아질 수 없겠구나!' 좌절하고, 고통 받으며 또 운동하고, '정말 잘 쉬지 못하는 게 문제인가?'하고 자책했다. 무리한 수준에 도전하는 것은 반복된 실패로 이어지고, 어떤 실패는 크게 아팠고, 그 실패를 극복하는데 드는 정신적인 에너지는 적지 않았다. 내가 지금 해내기에 굉장히 무리한 수준에 도전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대단한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건 망상에 가깝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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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에서 12월까지 저멀리 왕복 세 시간 거리의 신경외과를 다녔다. 그곳은 약물이나 주사치료를 하지 않고 운동 재활을 위주로 하는 독특한 병원이었다. 거기에서는 낮은 난이도의 복압 조절 훈련을 받았다. 여기서도 문제는 레벨링이었는데, 병원에는 나보다 더 약하고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분들이 주로 오시다보니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낮은 부하의 운동만을 시켰다. 그러다보니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움직임도 최대한 제한하라고 조언을 받았고, 체력은 점차 떨어지고, 통증에도 눈에 띄는 변화를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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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전부터 많은 요가 수업을 찾아들었는데, 요가를 할 때 마음은 즐거웠지만 몸은 곧잘 고통받았다. 무엇보다 관절이 지나치게 유연해서 부상이 잦았다. 그러다가 한 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그 선생님께 요가 지도자 과정을 들을만큼 매력을 느낀 것은, 늘 레벨을 고려해 자신에게 맞는 수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서 였다. 팔이 짧다면 블럭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도록 하고, 여러 자세에서도 자신에게 맞는 레벨로 수행할 수 있도록 여러 선택지를 제공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스스로의 수련을 원하는 속도로, 강도로 끌고 갈 수 있도록 믿어주고 도와줬다.
하루는 선생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수업에 들어왔다. 요가원에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 한 분이 찾아오셨는데, 몇 번 듣다가 안 오시겠다고 하시기에 ‘어떤 부분 때문에 그러세요?’하고 여쭤보았단다. 그랬더니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몇번이고 한 다리를 손과 손 사이에 놓으라고 하는데, 그게 한번에 그렇게 돼야 말이지. 남들 다 하는 게 안 되는 게 얼마나 속상하던지..’라고 하셨다고 했다. 레벨링의 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그룹 수업은 다양한 몸과 수행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다보니 모두의 레벨에 맞추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금 수준도 얼마나 어려울 수 있는지 고려하지 못했다며 두고 두고 후회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선생님께는 요가 선생님으로서의 원칙과도 이어지는 중요한 문제였다.
자신의 레벨에 맞는 요가가 좋은 요가가 아닐까. 요가라는 단어를 그 무엇으로 바꿔도 이상하지 않다. 운동, 수학, 달리기, 일, 삶, 그게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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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에 있어서 나에게 0.1은 바른 호흡이었고, 0.5는 호흡을 통해 복압을 조절하는 방법을 연습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 부분이 해결되지 않고는 레벨 1이든 레벨 2이든 모래 위에 쌓은 성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레벨 1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받아들이기에 좀 불편했지만, 레벨 1이 아니면 어떤가. 0.1에서 배워야 할 것을 착실히 배우면 그뿐이다. 하루 1만보를 천천히 걷는 것도 힘들었던 내가 2킬로미터를 무리 없이 뛸 수 있게 된 것도 레벨 0.1 덕분이다.
레벨링의 실패는 제대로 된 수행과 성장의 실패로 이어진다. 내가 레벨 1에서 헤매고 있다면(충분한 시간을 들여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쩌면 내게는 레벨 0.5 혹은 0.1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여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들을 때는 당연한 이야기 같아도, 막상 현실에서는 그게 무엇이든 내 수준에 맞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내가 명상 수업을 들었는데 감흥이 오지 않는다면, 몸과 단절되어 있는 상태로 오래 살아온 나에게는 가장 '기본적'이라는 숨 명상이 너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기본이라는 말에 속지 말자.) 그건 아마도 자신의 능력 혹은 상태에 대해 너무 과신하는 측면이 있어서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에게 너무 어려운 게 아닐까?'라는 질문은 '나에게 너무 쉬운 게 아닐까?'보다 조금 더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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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의 측정과 그에 따른 적절한 수행은 나 자신의 성장에도 중요하지만, 내가 일로서 성장을 도와야 하는 대상이 있는 경우에는 더 중요해진다. 생각보다 레벨을 정확히 파악하는 전문가, 그리고 레벨 0.1을 안내할 수 있는 전문가가 많지 않다. 말 그대로 이런 프레임워크를 갖고 있는 전문가 자체가 많지 않아서다. 여러 방면으로 고민해봐도 ‘이것보다 더 쉬운 운동은 없어요.’라는 말은 용납될 수 없는 말이 아닐까 한다. 운동이든 어떤 학문이든 지도자의 전문성은 수준을 파악하는 안목과 그 수준에 맞는 충분히 더 쉽고도 효과적인 단계를 연구하는 데에서 오는 게 아닐까. 그런데 레벨 1보다는 레벨 0.1을 안내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아 고민이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조금 더 공부해서 이것보다 쉬운 운동을 고안해볼게요!'의 태도로 임하고 싶다.
P.S. 🍠 나는 고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