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자기계발을 위해 쓰고(쓰기야말로 사유와 학습을 위한 중요한 기술이라면서),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쓴다고는 하지만, 아무도 시키지 않는데다 이렇다 할 목표가 없는데 계속 쓰는 사람도 틀림없이 존재한다. 나도 '그런' 류의 쓰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이때의 뉘앙스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의기양양한 톤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우한 운명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듯한 한숨 섞인 투도 아니다. '저는 회사원입니다'하는 정도의 투다. 저는 쓰는 사람입니다.
쓰는 사람에 대해서 혼자 곱씹어 보게 된 것은 에세이집을 내고 나서 느꼈던 묘한 감정 탓이었다. 책을 읽어준다니 고맙기는 한데, 또 한켠으로는 '앗! 이 사람이 나를 알게 되겠군..' 혹은 '나를 좀더 설명해줄테니 편하군..' 하는 미묘한 마음들이 번갈아가며 나타났다. 짐작컨대 책 속의 글들이 나와 동일시되어 있었고, 이 글들은 나를 더 드러내고 나의 선택을 설명하려는 욕구의 집약체였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이상하게도 정말로 내가 관심있어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지 못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상대의 관심 영역이 아닐 거라고 미리 짐작한 탓도 있겠지만, 너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단 방어적인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중요한 걸 꺼내놓았다가 별볼일 없이 취급받는 일이야말로 정말 괴로운 게 아닌가.
한편 글로 쓰면 상대방의 의중을 살피지 않은 채 충분히 설명하고, 내가 선택한 밀도로 심사숙고해 표현할 수 있어서 좋았다. 관계 속에서 나를 드러내는 일은 대체로 어려웠던 것에 반해, 글로서는 나를 드러내기가 조금 덜 어려웠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다보니 날 드러내는 데엔 대체로 목말라 있었고, 충분히 드러내지 못해 괴로울 적이면 책상 앞에 앉았다. 그래서 막상 '써보자!'하고 쓰려고 할 때는 잘 써지지 않다가, 어떤 식으로든 드라이브가 걸리면 그때는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출력 버튼만 누르면 되는 프린터처럼 정확하게 저장되어 있었고, 글로 옮기기만 하면 됐다. 그럴 때는 내가 글을 쓴 게 아니라, 글이 '쓰였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했다.
드라이브가 걸릴 때가 언제인가 하고 살펴보니, 어떤 식으로든 오해받을 때야말로 글을 써내려갈 절호의 기회였나 보다. 그때가 가장 나를 설명하고 싶은 때였고, 굳이 시간을 내어 찬찬히 생각을 말로 배열할만한 동기와 에너지를 갖고 있었다. 그럴 때는 비교적 좋은 글을 쓰게 됐다. 물론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에 파묻혀 있을 때가 아니라, 그 감정이 처리되고 충분히 그 경험이 소화되었을 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해받는다는 건 때로는 즐거운 일이기까지 했다.
*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거의 말로 해버리는 사람이라면 글을 쓸까?
겉으로 속이 비쳐 오해받지 않는 사람이 글을 쓸까?
두 눈을 보고 직접 '사랑해!' '나는 이럴 때 너가 미웠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굳이 편지를 쓸까?
졸업할 때나, 퇴사할 때 나에게 편지를 건네는 쪽은 주로 예상밖이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이렇게나 나에게 마음을 줬구나'하고 놀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해왔다. 당신도 틀림없이 쓰는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