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1:1 명상 세션에서 나와는 삶의 접점이 거의 없는 분들을 만나면서 이번에는 코끼리 다리가 아니라 코(..가 좀더 본질에 가까우니까)를 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하 모먼트 중 하나는 마음 운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분과의 세션에서였다. 5-6주가 지나도 세션 중에 10분 명상하는 것이 어려운 분이었는데, 혼자서 명상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1:1 세션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어떤 부분이 어렵게 느껴지세요?' 물었더니 처음에는 '지루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몇 번 더 다른 방식으로 물었더니, '계속 할 일이 떠올라요.'라고 하시다가 조금 이따가는 '
가만히 있는 순간을 견딜 수가 없어요'라는 답을 했다. 그 말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견딜 수가 없다'는 느낌이었던 거다. 그제서야 처음 무미건조하게 토로했던 지루함은 아주 순화한 표현이었다는 걸 알았다.
잠깐 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주의는 크게 외부를 향해 있을 수도 있고, 내부를 향해 있을 수도 있다. 외부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바깥의 것이다. 횡단보도가 없는 길에서 길을 건널 때 우리 주의는 거의 백 퍼센트 다가오는 차들(외부)을 향해 있을 거다.(조심해야 하니까.) 상대와 대화할 때도 많은 경우 외부를 향해 있을테고(집중하지 못하고 딴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굉장히 집중해서 테니스를 칠 때도 일반적으로 주의가 외부, 즉 공을 향해 있다. 반면 벚꽃이 피어있는 줄 모르고 어제 있었던 괴상한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때는 주의가 내부를 향해 있다. 주의가 내부를 향해 있으면 길을 걸다가 뜬금없이 넘어질 뻔 하기도 한다. 자주 공상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어딘가 불편하고 아픈 데가 있으면 주의가 내부의 감각을 향한다. 또 자기 전에 눈을 감으면 주의가 하는 수 없이 내부를 향한다.(그리고 괴로워 한다.) 이렇게 주의는 외부를 향했다가 내부를 향하고, 동시에 외부와 내부를 향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할 일들을 계속해서 처리한다면 주의는 어떨까. 주의가 외부를 향해 있어 내 몸의 느낌이나 기분을 느낄 여력이 없다. 세션으로 만나고 있는 다른 분은 늘상 음악을 틀어둔다고 하셨다. 공부를 하거나, 정말로 음악을 들을 수 없을만큼 초집중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늘 음악을 틀어야만 한다고. 음악을 끄고 생활해본다면 어떻겠냐 물었더니, '그건 좀.....'이라고 하셨다. 왜 음악을 끄기가 어려운 걸까? 얼마 전 내가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서 팟캐스트를 들으려고 핸드폰을 갖고 들어갔더니, 영은이 옆에서 '샤워할 때는 핸드폰 갖고 들어가지 말지.'라고 핀잔을 줬다. 나는 왜 샤워실에 핸드폰을 갖고 갔을까? 왜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면서 한 손으로는 영상을 보고 있는 걸까? 대체로 비슷한 이유 같다. 첫 번째 돌아오는 대답은 '지루해요'겠고, 두 번째로 돌아오는 대답은 '견딜 수가 없어요' 일지도 모른다.
많은 경우에 주의를 외부에 두고, 주의를 내부로 두는 순간(이를테면 자려고 누워서 몇 시간을 영상을 보다가 핸드폰을 겨우 손에서 내려놓은 순간)에 대해 약간의 두려움과 경계심을 가진 채 살아간다. 주의를 내부에 두면 이 순간의 내 생각과 느낌에 집중하게 되어서다. 특히나 내가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내 짜증나는 감정을 느끼는 게 괴로운 것이다. 내가 행복하고 고요하다면 사실 주의가 내부를 향할 때의 경험이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그 느낌을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되어서 행복을 음미하게 된다. 명상이 괴로운 건 정말로 '명상' 자체가 괴로운 게 아니라, 일을 하지 않는 순간, 주의가 내부를 향하는 순간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잘 쉬지 못하고, 휴식 자체가 괴로운 것도.
어쩌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중독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콘텐츠 중독에 취약하다.) 모든 중독은 괴로움을 끄기 위해서 시작된다. 게임, 영상, 술, 담배, 포르노, 먹기, 그게 뭐든 자극의 강도만 다를뿐 작용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괴로움을 자극으로 덮는 것이다. 일도 마찬가지다. 일이 포르노는 아니지만, 포르노만큼이나 강력하게 괴로움을 덮는 도구가 된다. 심지어 일은 잘하면 격려도 받잖아. 그런데 문제는 괴로움이 덮는다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닌 채로 끌려가듯이 몰입하고 있을 때, 그때는 '나는 왜 이걸 계속하지? 왜 그만두지 못하지?'하고 채근하던 것을, '내가 지금 괴로운가? 내가 지금 힘들어하고 있나?'하고 다르게 접근하면 어떨까? 나와의 대화를 시작하는 거다.
쉬는 게 어려운 사람들이 가진 문제는 주의력도 아니고, 중독 그 자체도 아니다. (물론 이미 중독된 것이 있다면 중독에 특화된 별도의 테라피가 필요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삶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보려면, 충분히 대화를 해봐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와의 충분한 대화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딜 수 없다면, 일 외에는 삶에 그다지 즐거움이 없는 경우도 흔하다. 실제로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가족과의 관계에 있지만(일도 가족을 위해서 하지만), 막상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대신 더 일하는 것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속사정을 들춰보면 단순히 바빠서가 아니라, 이제까지 가족 구성원 사이에 안전하고 즐거운 소통이 없었던 것, 마음을 낸만큼 좋은 경험으로 돌아오지 않아 내심 상처받았던 일이 드러날 수도 있다. 처음에는 '명상이 지루해요'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흘러 흘러 '가족과의 대화법을 바꿔볼 수 없을까'로 향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도망 천재인가! 싶을 때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을 묶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나와의 대화로부터 도망가는 데는 우리 모두 도가 터있다는 거다. 개인 세션을 본인 돈으로 결제해서 오면서도 거의 교장실에 끌려가는 느낌으로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하는 분도 있다. (인간이란 역시 꽤나 얼렁뚱땅인가.) 물론 그만큼 처음에는 두렵고 어려운 일이서다. 하지만 두려움을 무릅쓰고 꼭 대화를 시작했으면 좋겠다. 자주 내가 어떤지 살피고, 어려움이 있다면 어려움이 있다는 걸 인정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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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당신의 꿈을 그려주세요.'라는 항목에 편안하게 잠 드는 장면을 그린 멍상가가 있었다. 다들 나름대로 화려하고 자유로운 일상의 모습을 스케치했는데, 편안하게 쉬고 잠드는 것이 꿈이라는 말을 듣고는 순간 그 공간의 공기가 달라지는 걸 느꼈다. 모두들 마음이 짜르르했던 것이다. 좋은 휴식은 누군가에게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