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에서 만보 걷기 v. 공원에서 만보 걷기
주말에 날이 너무 더웠다. 매일 같이 지켜오던 만보 걷기를 오늘은 달성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밖에서 많이 못 걷겠어."
"실내에서는 걸을 수 있지 않을까?"
"(같이) 백화점?"
실내가 시원한 백화점이라면 만보를 걸어볼 수 있지 않을까? 별 생각 없이 영은과 주말에 만보 걷기를 하겠다며 여의도 더현대 백화점으로 나섰다. 지하 5층에 차를 대고, 지하 2층부터 구경(을 빙자한 걸음수 채우기)을 시작했다. 더현대에는 이전에도 몇 번 와봤지만, 올 때마다 사람 수에 (치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구석구석 지하 2층까지도 이렇게 사람이 많을까? 이곳에는 사람만 많은 것이 아니라, 그들 손목에 걸린 쇼핑백도 많았다.
한 층을 다 돌고 나니 피곤함이 엄습해왔다. 체감상 5500보는 걸은 것 같았는데, 스마트워치를 보니 아직 천보 밖에 안 걸었다고 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알 수 없는 피로감이었다. 잠시 '역시 공기가 안 좋나?' 하고 대충 넘어가려 했는데, 공기가 안 좋은 공사장을 걸으면서도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컨디션이 떨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참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신문물을 구경하는 건 나름대로 즐거워서 더 혼란스러웠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다가 내 앞에서 갑자기 동선을 바꾼 두 명의 여성분들과 크게 부딪힐 뻔했다. 서로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날쌔게 빗겨갔지만, 바로 앞에 에스컬레이터가 있어 자칫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들이 몇 번 반복되고 나니 이 공간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또 예상치 못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체감했다. 각자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처리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쓰고 있는걸까.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나란히 걷는 것 자체가 이미 힘든 일이었다.
매장은 또 어떤가. 백화점의 본질은 사람들의 주의를 갖고 싸우는 공간이 아닌가. '나를 봐줘!!!' 외치는 매장들 사이에서 우리에게 남은 선택권은 없었다. 스마트폰을 할 때처럼 시선이 분초단위로 왔다갔다 하며 연신 상품을 살피고 있었다. 뭐라도 하나 놓칠까, 은근히 집중하게 되는 거다. 판매를 기다리는 수많은 상품들과 그 상품을 빛내주기 위해 마련된 디스플레이는 또 얼마나 (자극적이고) 아름다운가. 하나, 하나 봤을 때는 아름다운 것도 이렇게 한 공간에 쏟아부어져 있으니 시각적으로 엄청난 피로를 만들고 있었다.--백화점의 딱 한 코너가, 아무것도 없는 공원 어딘가에 탁 옮겨져 있다면 훨씬 즐겁게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참 인간은 적당히 만족할 줄을 모른다. 좋은 것을 지나치게 부풀린다. 독이 될 정도로. 결과적으로 눈을 사로잡는, 재밌는 상품과 기획들이 너무 많았고 신경계는 과부하가 걸려 소리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쇼핑하면 마음이 편안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머릿 속에는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걸 산다면 앞으로의 한 달이 괜찮을 것인가..?' 경제적인 고민부터, '이게 내게 필요한가? 나에게 잘 어울리나?' 하는 고민, ' 저 사람은 저 옷이 어울린다고 보나..?'하는 쓸데없는 오지랖이 쏟아졌다. 공원에서 만보를 걸을 때는 그냥 벌레 먹은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는 걸 보고, 발걸음이 무거운지 가벼운지 느끼고, 이따금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며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을 뿐, 그닥 많은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걸으면 걸을수록 생각이 정리되고, 또 생각이 사라진다. 그런데 백화점에서는 걸으면 걸을수록 생각이 많아지는 거다.
결국 만보를 다 채우지 못했다. 7000보쯤 걸었을 때, 한 10K는 달린 것마냥 이미 에너지가 바닥나버렸다. 거의 바닥에서 발이 안 떼질 지경이었다. (진짜로.) 백화점은 대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 설계했길래, 이렇게 길 찾기가 어려울까. 생리적 과업(?)도 참 풀기 어려운 과제로 만들어 버린다. 물 마시는 데가 어딨지? 물을 살 수 있는 곳이라도 있나? 화장실이 어딨지? 찾다 찾다 별의별 매장을 다 지나다녔다. 골프복 매장, 가구 매장, 수영복 매장... 정말이지 백화점에서 화장실 잘 찾는 것도 재능이다. 가는 길목에 수많은 가게들을 지나쳐가면서 점점 화장실은 더 급해지고, 목은 탔다.
쇼핑이 이렇게 힘든 일이라면 먹기라도 제대로 해야되는 거 아닌가! 겨우 지하 푸드코트로 나섰다.
"후... 밥이나 잘 챙겨먹자."
그런데 힘든 활동에 준하는 영양가 높은 음식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제길! 가격도 어려워! 이번 주말의 교훈. 백화점은 재밌는 곳이지만, 백화점에서 만보 걷기를 하는 건 참 무식한 짓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