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애인과 이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하는데 영 헤어지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계속 볼 사이인 양 웃고 떠드는 동안 3시간이 훌쩍 흘렀고, 아쉬움에 전화기만 붙잡고 어쩌지, 어쩌지 하던 우리는 시간을 가지면서 어떻게 될런지 지켜보는 쪽으로 합의했다. 속으로는 '뭘 지켜본담. 지켜보면 어쩔 건데.' 싶었지만, 나로서도 이렇다할 결심이 서지 않았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제껏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선택에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이 오가는데, 그가 "봐, 우리가 이래서 P인 거야. 둘 다 결정을 못 하잖아." 라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발끈해서 "내가 P라서 결정을 못 하는 거라고?" 라고 했고, 그는 "아니지. P라서 결정을 못 하는 게 아니라, 결정을 못 하니까 P인거지."라며 쓸데없이 인과관계 정정까지 해줬다. 참고로 그는 T였다.
어딘지 쓸쓸함을 자아내는 사람이었다.
첫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승강장으로 그가 탈 열차가 먼저 들어왔다. "오늘 재밌었어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예의 미소를 띄우고 상대의 얼굴을 올려다 봤는데, 표정이 묘하게 슬퍼보였다. 멈칫한 내게 그는 말 없이 손을 흔들더니 뒤로 돌아 휘휘 걸어 지하철에 올라탔고, '출입문이 닫힙니다' 하는 안내 음성과 함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게 내가 두 번째로 본 그의 뒷모습이다.
첫 번째 뒷모습은 그날 방어 먹으러 횟집 갔을 때 봤다. 밑반찬을 더 가져오려고 식사 중간에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한 손에 빈 접시를 들고 특유의 걸음새로 식당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따지자면 터벅터벅에 가깝겠으나 질질 끌거나 비척대는 느낌은 아니었다. 걸을 때마다 가벼운 체념 같은 게 깃털처럼 날리는, 나로서는 처음 보는 걸음걸이였다. 본인은 여유롭게 걷는 듯 했지만 키가 커서인지 몇 걸음 만에 금세 멀어졌다. 셀프 코너 앞에 서서 김치와 편마늘, 깻잎 따위를 집게로 집어 담는 그는 허리를 구부린 채였다. 성큼한 키로 휘휘 걸어가 허리를 숙이고 반찬을 담는 뒷모습에서 나는 왜인지 쓸쓸함을 느꼈다.
어느 날은 그 사람이 자기가 다니는 회사 이야기를 해줬다. 나는 그때까지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
제대로 만나보기도 전에 상대 직업이나 따지는 속물이라 생각할까봐, 괜히 혼자 겸연쩍어서 물어보지 못 했던 것이다. 초면에 무슨 일을 하느냐, 회사는 어디에 다니냐 묻는 일이 스스로도 캐묻는 듯 생각되어 조심스럽기도 했다. 초면이 아니게 된 이후에는 타이밍을 놓쳤다는 생각에 못 물어봤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태연한 척 했지만 그가 다만 불법적인 일은 하고 있지 않길, 나름대로 정직하고 건실하게 사는 사람이길 속으로 열심히 바랐다(나는 N이므로,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를 계속 만나야할지에 관해서도 상상했음은 물론이다).
알고 보니 그는 알 만한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그날 그는 어디서 들었는지 읽었는지 모를 회사의 일대 역사에 관한 한 편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초대 창업자와 그 측근들의 비화, 회장의 아들이 장성해 자신의 아버지가 세운 회사에 입사했을 무렵의 에피소드, 점차 대두된 경영권 승계 문제와 이어서 일어난 전격적인 인사 교체, 그에 따라 여러 계열사들이 겪은 부침에 관한 이야기는 실로 실감났다.
그가 대기업을 다녀서가 아니라 그가 들려준 이야기가 정말로 재밌었기 때문에 나는 푹 빠져서 들었다. 대기업에서 일하려면 자기 회사에 관해 이 정도로는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 걸까, 나는 감탄했다. 내 개인의 역사에 관해서조차 그 정도로 흥미롭게 소개할 자신은 없는 나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하며 듣는 나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는 스스로도 즐거운 듯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런 삶, 커다란 조직에 몸담고 꾸준히 승진을 노리는 삶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철저히 그 사람의 인생이고 본인이 내린 결정이므로 제삼자인 내가 이러쿵저러쿵해봐야 아무 의미도 없지만, 내 눈에 그가 자리에 자신을 맞춘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루는 그가 한 건물 2층을 가리키며, 예전에 저 공간이 매물로 나왔을 때 계약하려 한 적이 있었다며 내 손을 이끌었다.
올라가서 보니 그곳은 이제 와인바로 운영되고 있었다. 콘크리트 벽을 노출시킨, 소위 인더스트리얼풍의 인테리어를 한 매장이었는데 가벽 때문에 안쪽이 다 보이진 않았다. 그는 원래 이곳 컨디션이 어떠했는지를 공간의 크기와 구조를 들어 설명했다. 만약 계약했다면 이런이런 분위기의 가게를 하려 했었다고, 당시의 계획을 멋드러지게 제시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때도 그곳이 그가 있을 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어도 어쩐지 그 계획이 그가 진심으로 하고 싶어했던 일이었을 거라고 여겨지진 않았던 것이다.
그날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번화가를 걸었다. 그가 오른편의 큰 빌딩을 가리키더니 자신이 이 회사에 총 세 번 지원했으며 세 번 다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고 불쑥 고백했다.
"세 번이나 최종 면접까지 간 게 대단한 거지."
내가 말했다.
지하철 승강장에서 헤어지던 날처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단하다는 내 말은 여러모로 진심이었다. 나는 어딘가에 세 번씩 지원할 저력도 없거니와 세 번씩 떨어질 자신은 더더욱 없다. 같은 곳에 세 번이나 떨어지고도 내가 무사할 수 있을까.
그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그는 내 눈을 피했고, 위로에 소질이 없는 나는 묘하게 슬픈 표정으로 다른 곳을 보며 걷는 그의 손을 그냥 더 꼭 잡았다. 나는 그가 합격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고 생각했지만 그 회사에 붙는 게 한때나마 그가 바랐던 일이었고, 세 번이나 떨어졌을 땐 좌절스러웠을 것이므로 붙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을 뿐, 양복을 갖춰 입은 그가 그 커다란 빌딩에 들락거리는 모습이 썩 잘 그려지진 않았다.
그는 다른 어느 때보다 걷고 있을 때 가장 자기 자신이 되었다.
그는 이야기 도중에 "나가서 걸을까?" 하고 묻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물어봐주는 사람이어서 좋아했다. 걷는 동안 그가 자신에 관해 들려주는 얘기를 내가 좋아했다.
나란히 걸을 때 그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는 십 대 소년이 있었다. 스물 서너 살의 대학생과 스물 아홉 살짜리 청년도 등장했다. 그 이야기 속에서 그는 다만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었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삶 앞에서 방황하는 한 인간이기도 했다.
그가 나 대신 다른 곳을 보며 들려준 이야기 덕분에 나는 이따금 그를 이해했다. 그가 짓는 표정의 의미를 나는 종종 알 수 없었지만, 걸음을 박자 삼아 풀려나오는 이야기 속에서나마 그라는 사람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그것은 무거운 책가방을 멘 고등학생의 뒷모습이었다가, 크로스백을 하고 교정을 가로지르는 대학생의 뒷모습이 되었고, 버스 막차에서 내려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지던 청년의 뒷모습은, 하루 끝에 방의 불을 끄고 침대로 걸어 들어가는 직장인의 뒷모습 되기도 했다. 그 뒷모습들이 잔상처럼 남아, 눈을 감으면 내가 만들어낸 기억 속에서 그는 언제나 등을 보이고 휘 멀어지는 중이었다.
어제는 모처럼의 휴일이었다.
한산한 거리를 나홀로 걷는데 문득 그 사람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그와 함께 이곳을 걸었던 적이 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밥 먹듯이 하던 야근은 좀 줄었으려나. 아무리 대기업이라지만, 아무렴 돈도 많이 주겠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격무에 나날이 생기를 잃어가던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우리 친구로 지내자." 였다.
흥이다. 난 P중에선 J인지라 애매한 관계는 사절이다(애매한 거랑 P는 상관없나?). 어제 그 거리를 걷겠다는 계획도 이틀 전에 세웠으니 말 다 한 것 아닌가(아닌가?). 게다가 한 번 좋아했던 이성과 친구가 될 수 있을리 만무하다는 걸 머리로 알고 있다. 그래도 아주 모르는 사이로 지내고 싶진 않았는데. 안부 정도는 가끔 묻고 싶기도 했는데, 그게 내 마음이었는데.
머리가 시키는 대로 나는 결국 완벽히 헤어지는 쪽을 택했다. 합리적인 선택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쩌면 나 역시 T여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참고로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