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언이요. 네, 전화번호는….”
서대문구 보건소에서 ‘대사 증후군 검사’를 무료로 해준다는 소식을 듣고 영은이 나를 빙자해 신청을 했다. 정말 심각한 일이 아니라면 병원에 가지 않는다는 신조에 어긋나는 데다, 근 1년 동안은 나름대로 건강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기에 검사를 받으러 가는 일이 내키지 않았다.
“무슨 검사인데?”
심드렁하게 물었다.
“혈당이랑 콜레스테롤, 혈압 같은 거 재는 거야. 인바디도 하고.”
3년 전인가? 전반적으로 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콜레스테롤 수치가 좋은 편이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별문제 없겠지, 뭐. 이렇게 건강하게 사는데.”
가운을 대충 걸친 의사는 오늘 검사가 많다며 연신 투덜거리면서 작은 막대기 같은 걸 손끝에 콕 밀어 넣었다. 그 속에 바늘이 숨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작은 구슬 캔디처럼 말간 피가 맺혔다. 귀여운 스포이트로 피를 쏙 빨아들이고서는 수상한 기계에 넣었다.
“5분만 기다리세요. 곧 결과가 나옵니다.”
기다리는 동안 혈압 검사와 인바디를 했다. 키는 166, 몸무게는 5X.. 거기까지는 내가 아는 사실인데, 체지방과 근육량이 내가 기억하는 숫자와는 달랐다. 근육이 줄어들고 체지방이 늘어나 있었다. 뭐지?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혈당 수치는 좋으시고. 콜레스테롤이 조금 높게 나왔어요. 조금 더 욕심을 내본다면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보는 게 좋겠어요. 술, 담배 안 하시고. 운동도 열심히 하시는 것 같은데. 어머, 인바디가 좋지 않네요…. 무슨 운동을 하시는 거죠?”
“달리기하고, 요가하고요. 수영도 해요.”
“그렇게 하는 것 치고는 체지방이나 근육량이나 지표가 좋지는 않아요. 운동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확인해 봐야 하겠고요. 식단도 문제가 있을 수 있어요. 무슨 음식 자주 드세요?”
지표로 보는 것과 지표에 대한 전문가의 평가를 듣는 건 무게가 다른 법이다. 약간 겁을 주는 것이 보건소의 프로토콜이었는지, 꽤 심각한 어조로 건강 관리의 중요성에 대한 일장 연설을 듣다 보니 끝날 때쯤에는 약간의 위기감이 들었다.
그는 시계를 보더니 달력을 넘기며 내년에 다시 오라고 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내년 3월에 언제 올지 시간 약속까지 잡았다.
“견과류 좀 드시고요.”
손에 견과류 두 봉지를 쥐여줬다. 옆에서 상담받고 있던 영은을 잠시 기다렸다. 영은이 나를 끝내 보건소에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상담해 주시는 분은 되게 열을 내면서 말씀하시더라.”
“맞지?”
문을 밀고 나갈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집에 다다를 때쯤에는 짜증스럽다 못해 분하기까지 했다. (귀에서 증기가 나오는 것 같았다.) 아니,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생활 습관에 뭐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만 하고, 뭘 하라고 정확히 말해주지도 않고! 콜레스테롤이 높아진 건 또 뭐냐. 나는 고기를 많이 먹지도 않는데! 지난 1년 동안 건강에 심혈을 기울여 온 것을 생각하면 이 실망스러운 성적표가 그간 해온 노력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억울했다.
아마도 가장 신경을 덜 썼던 식단의 문제일 텐데, 식단에 문제가 있다고는 솔직히 믿고 싶지 않았다. 어제 마셨던 달큰한 크림커피와 뺑오쇼콜라는 내 마음 속 안락한 소파였으므로. 업무 채팅창을 켜놓고 마우스를 굴리면서도 몇 가지 생각 늪에 계속 빠져들었다. 디저트를 먹더라도 많이 먹지는 않는데. 빠삐코를 3일에 나눠 먹는 수준인데. 그것도 문제가 되나? 속으로 그것도 뭐 문제가 되겠지. 빈도가 잦으니까, 하는 또 다른 목소리가 마음 한편에서 들렸다.
할 일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서는 멍하니 유튜브를 봤다. 간헐적 단식에 대한 영상이 피드에 떴다. 간헐적 단식이라. 간헐적 단식을 하면 역시 배가 고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늘 소화기가 약했던 나에게 간헐적 단식은 도전해 보지 않은 영역이었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방식에는 확실히 구미를 당기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영상에서는 내가 아는 것 같았던, 하지만 알지 못했던 이야기가 한가득이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케이크와 같은 고열량 탄수화물을 섭취한 이후의 혈당 그래프였다. 뺑오쇼콜라 같은 디저트를 먹은 후 혈당을 측정하니, 빠르게 혈당이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툭 꺼지며 혈당이 불안정해졌다. 오잉? 이제껏 나는 배가 고프거나 고프기 직전에 허겁지겁 열량이 있는 간단한 음식들(에너지바, 떡, 빵)을 착실히 먹어오면서 때때로 의문을 품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자주 챙겨 먹는데도 왜 이렇게 금방 배가 고파지고 기력이 없지? 그런 와중에도 식습관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무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했나 보다.
그 영상에 따르면 이제껏 배고플까 봐 먹었던 음식들이 나를 더 배고프게 했던 걸지도 몰랐다. 어떻게, 무엇을 먹는지가 모두 중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나는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말로 알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20년 전통(?)을 가진 두 가지 습관이다.
- 배고프기 전에 틈틈이 조금씩 먹기
- 주로 열량의 7~80퍼센트를 탄수화물로 채우기
체지방을 태우지 못하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구축해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난 3주 동안 정확히, 반대로 두 가지를 시도하고 있다.
하루 두 끼만 먹는 건 꽤 힘들 줄 알았다. 신기하게도 평소 식단에 단백질을 신경 써서 채웠더니 생각만큼 허기지지도, 속이 쓰리지도 않았다. 이전에 시도 때도 없이 배고파했던 걸 생각하면, 간식이나 끼니 등 먹는 빈도가 확연히 줄어든 지금 배고프다는 말을 덜 하고 있다. 황당한 노릇이다. 굶는데 배가 안 고프다. 그러니까 굶는 게 굶는 게 아닌 게 된다. 게다가 한 끼를 줄이는 것만으로 시간과 에너지, 돈을 엄청나게 아낄 수 있다는 것도 특장점이다. 먹는 게 낙인데 한 끼가 줄어들면 서운하지 않을까 싶지만, 오히려 딱 두 끼만 먹기 때문에 먹을 때 더 맛있게 먹게 되는 점도 만족스럽다.
반면에 밀가루는 줄이는 건 생각보다 훨씬, 아주 어려웠다. 디저트류에는 거의 항상 밀가루가 들어가는 데다, 파스타나 비빔면, 만두, 부대찌개… 내가 좋아하는 거의 모든 음식에 밀가루가 들어 있는 것은 비극이었다. 밀가루를 아예 먹지 않은 며칠 동안 서서히 풍경이 잿빛으로 변하길래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비건' ‘글루텐프리'라는 이름이 붙은 디저트로 설탕, 버터, 밀가루가 몽땅 들어간 디저트를 대체할 수 없다. 이건 나에게 얼마 남지 않은 고집스러운 신조다. (그것들은 '가짜'다!) 그러니 계속 먹되, 더 아껴서 귀하게 먹기로 한다.
추석 때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떠나는 당일은 정신없을 테니 당장 넣을 수 있는 옷가지들은 가방에 미리 넣어두고, 자네를 맡아줄 갓파더와 갓마더(그들은 부부다)를 위한 작은 선물들을 샀다. 떠나기 1일 전에는 집 청소를 했다. 먼지를 털고, 청소기를 돌리고, 냉장고를 비우고, 남은 재료를 다 쓰기 위한 몸부림으로 희한한 요리를 해 먹었다. 떠나는 당일, 이제 집을 나가려는 참이었다.
“어? 설거지가 있네.”
컵과 접시 두어 개였지만, 설거짓거리를 싱크대에 남겨놓고 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수챗구멍은 비워놨으니까 괜찮아.”
“아니야, 해두고 가는 게 좋겠어.”
남은 설거지를 마저 하고, 행주를 꼭 짰다.
설거짓거리를 남겨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쓰면서 저항감이 들었다. 그보다는 설거지를 싱크대에 남겨 두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에 맞지 않는다. 어차피 해야 할 설거지, 바로바로 해두는 것이 좋다. 굳이 걸리적거리는 것을 남겨두지 않는다. 마음에 밟히는 과제들을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확실히 그렇다.
요즘은 몸에 남은 설거짓거리를 하나둘 씻어내는 기분이다. 설거짓거리가 남지 않은 싱크대처럼 내 몸이 대체로 가뿐하게 비어 있으면 좋겠다. 달릴 때, 요가할 때, 춤출 때 몸이 나를 붙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날쌔고 가벼웠으면 좋겠다. 대체로 산뜻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