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향 바디로션
가을이 왔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이제 정말 가을인가?
그렇다, 라고 하는 순간 여름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가을이 왔는지 알아내는 데는 이런저런 방법이 필요하고, 태생부터 건성인 나는 피부로 가을이 왔다는 걸 알 수 있다(비염인들은 콧물로 안다고 들었다).
피부가 건조하기 전까지는 어쨌든 여름이다. 말로는 아무리 가을입네 해도 낮에는 여전히 더우며, 밤엔 선선하다곤 해도 창문을 닫으면 역시 갑갑하다. 집안일을 하느라 조금만 바삐 움직이면 여지없이 흐르는 땀 때문에 선풍기를 집어넣기도 애매하다. 본격적으로 옷장 정리를 할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계절을 알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간다. 더는 지금이 여름인지 가을인지 자문하지 않는다.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올 것이다. 계절이라고 다르겠는가.
그러다 문득 피부가 왜 이렇게 건조하지, 싶은 날이 온다. 수납장을 뒤져 여름내 어딘가에 치워둔 바디로션을 손 닿는 곳에 꺼내 놓는다. 그날로 나는 비로소 선풍기와 이별할 수 있게 된다. 반팔 잠옷과도 미련 없이 안녕이다. 가을이 온 것이다.
가을은 메마른 피부와 함께 온다.
타고난 건성인 나는 살면서 수도 없이 속았다.
수분을 채워준다느니, 촉촉함이 진피층부터 차오른다느니 하는 화장품 광고의 구할은 거짓이었다. 촉촉하다고 해서 써보면 기분 나쁘게 번들거리기만 했고, 산뜻함을 내세운 제품은 놀라울 정도로 전혀 보습이 되지 않았다. 화장품의 세계에서 산뜻함이란 알코올 함유의 다른 말임을 여러 번의 실패 끝에 깨달았다.
진짜를 가려내는 데 쓴 돈으로 집은 못 사도 저렴한 냉장고 하나는 살 수 있을 텐데.
요즘이야 좋은 제품이 많아졌지만, 나 때(?)만 해도 어떤 화장품에 무엇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알 길이 없었고, 그게 뭐든 일단 집어넣어 만든 후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내세워 이런저런 효과가 있다고 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동안 K-뷰티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제는 조금만 검색을 하면 합리적인 가격으로 좋은 성분의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산뜻한 제품은 더 이상 알코올 함유와 동의어가 아니며, 촉촉한 제품은 정말로 촉촉하다.
단, 보습이 잘된다는 제품일수록 제형이 되직해 펴바르기 힘드니 주의하자. 바디로션은 넓은 면적에 발라야 하므로 발림성이 생각보다 중요하다. 제형의 되직함과 바르는 데 필요한 인내심은 비례하고, 추운 계절은 생각보다 길다.
쌀쌀한 가을 저녁, 따끈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 바디로션을 바른다. 열린 창문으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손바닥에 로션을 덜어 꼼꼼히 바른다. 샤워로 후끈해진 목덜미에 서늘한 바람이 스친다.
내가 좋아하는 바디로션은 향이 없는 것.
무향의 로션을 바르는 동안 창문을 열어두면 이불에 찬 공기 냄새가 밴다.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 올리면 스산한 가을밤 냄새 속에서 잠들 수있다. K-뷰티 뿐 아니라 무슨무슨 뷰티에도 그런 향의 바디로션은 팔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