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우애가 각별한 남매 지간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와 내 남동생은 서로 “왜 저래” 하는 사이다. 어렸을 땐 좀 달랐다. 옛날엔 발을 쾅 구르고 소리를 꽥 지르며 “왜 저래?!” 했다면, 이제는 길에서 웬 이상한 사람을 본 것처럼, 멀찍이 떨어져 혼잣말로 “왜 저래...” 한다. ‘왜 저래’를 부르는 동생의 행동은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이를테면 이런 것들. 쟤는 왜 오예스를 한꺼번에 일곱 개나 먹지? 불가리스를 왜 지 혼자 한 줄을 다 마시지? 샤워를 왜 한 시간 넘게 하지? 샤워 하는데 왜 화장실 천장이 젖지? 왜 저렇게 많이 자? 왜 이렇게 안 자? 왜 집엘 안 들어와? 왜 집에서 안 나가?
알 수 없다. 동생이란 본디 왜 저러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동생은 어려서 낯을 심하게 가렸다.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직 어머니만이 동생을 돌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동생을 먹이거나 씻기거나 재우려고 하면 동생이 숨이 넘어갈 듯 울었기 때문에 육아의 대부분이 고스란히 어머니 몫으로 돌아갔다. 그게 아니더라도 결국 어머니 몫이긴 했겠지만.
그런 애를 두고 손님을 떼로 초대해 돌잔치를 열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동생이 태어나고 일 년이 지났을 때 부모님은 친척들을 초대해 집에서 돌잔치를 열었다. 내 아버지는 맏이고, 동생은 둘째긴 하지만 엄연히 장남이라서, 장남의 장남이 맞는 첫 생일을 축하하러 할머니, 할아버지, 그들의 형제 자매가 우리집으로 찾아왔다.
손님이 드물었던 우리집에 그처럼 많은 사람이 찾아온 일이, 내 기억으론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싶다. 주인을 알 수 없는 신발로 현관은 발 디딜 틈이 없고, 거실과 부엌은 물론 어느 방에나 양반다리를 한 어른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어서 숨을 곳이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어른들 곁에서 시간을 죽이며 그들이 하는 말을 주워들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동생의 존재를 기다려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동생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 했다. 동생을 안고, 동생이 웃는 걸 보려고 배를 간질이고, 까꿍 놀이를 하고 싶어했는데...
동생이 거부했다. 돌잔치 시작부터 끝까지 동생은 기를 쓰고 울었고, 그가 원하는 건 오로지 엄마. 그리고 자신을 만지려 하는 뭇 사람들이 전부 자기 집으로 가는 것. 누군가 동생을 안으려 할 때마다 그는 활어처럼 몸통을 펄떡이며 울어 재꼈고, 사람들은 그런 동생을 보며 “허허, 고놈 참” 했지만 씁쓸한 표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자신의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낯선 손아귀를 온몸으로 거부하던 동생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애써 입혀 놓은 한복은 벗져지기 일보직전의 상태로, 바지는 줄줄 내려가는 중이고 복건은 간신히 이마 끄트머리에 걸쳐져 있다. 그날 동생이 돌잡이로 뭘 잡았는지, 우리가 식사로 뭘 먹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오직 주인공밖에 기억나지 않는, 다른 의미로 성공적인 돌잔치.
그런 식으로 내가 동생의 어떤 순간을, 어쩌면 부모님보다 더 잘 기억하고 있어서 동생을 좋아하는 일이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네 살 터울이라서. 동생이 세 살일 때 내가 벌써 일곱 살이었고, 동생이 겨우 네 살일 때 나는 이미 초등학생이어서. 동생의 크고 작은 전적을 내가 다 기억하기 때문에. 동생이 망가트린 내 공책과, 그가 멋대로 쓴 아끼는 내 크레파스와, 나 없을 때 몰래 뒤적거린 서랍, 천연덕스럽게 먹어치운 내 몫의 과자와 아이스크림 등등.
우리가 만약 연년생이었다면 나란히 말썽을 피우고, 그중 일부는 함께 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정작 동생 본인도 기억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사건을 혼자서 기억하니 나만 한동안 억울했다.
어디 가서 내가 동생과 네 살 차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말한다. “네가 업어 키웠겠네~”
그 말을 할 때 사람들 얼굴이 시험지에서 아는 문제를 만난 학생처럼 환해졌다. 틀림없는 정답을 외치고 나를 지나쳐 갔다. 나는 대체로 아무 말 않았지만 내내 궁금했다. 내가 동생을 등에 업고 다니며 키웠을 거라고 다들 진심으로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실은 새해나 복에 별 관심 없는 사람도 해가 바뀌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듯 관례적으로 하는 말이려나.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도 마음 편히 “제가 다 키웠죠” 하고 대꾸할 텐데. 혼자 억울해 하지 않을 텐데.
동생이 갓난아기였을 때, 어머니 아버지는 내가 동생 근처에 함부로 가지 못하게 했다. 괜히 얼쩡거리다가 아기를 다치게 할까봐서다. 나는 부모님이 보는 앞에서만 동생을 가만 들여다보거나 살살 쓰다듬었다.
동생이 조금 더 자란 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나 된 기념으로, 친지들 앞에서 재미 삼아, 선 채로 뒤뚱거리며 잠시 업어본 일은 있어도, 동생을 업고 바깥을 돌아다니거나 업은 채로 키운 적은 결코 없다.
그나마도 다른 사람이 동생을 등에 얹어 주었기에 가능했다. 내가 허리를 낫 모양으로 구부정하게 하고 있으면 어른들이 내 등에 동생을 엎어 놓는 것이다. 나는 동생의 엉덩이께를 붙잡고 천천히 허리를 폈다가 몇 초 뒤에 다시 내려놓았다. 업는 흉내만 낸 셈이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어른들이 더 걱정했다.
“아기는 순식간에 다칠 수 있으니까 절대로 눈을 떼면 안 돼. 네가 다른 일을 하고 있더라도 항상 동생을 보고 있어야 해.”
나는 여전히 동생, 하면 어른이 된 동생이 아니라 서너 살 적 동생을 떠올리고, 그것은 내가 줄곧 걔를 들여다보아야 했던 그 시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동생과 같은 방에서 자던 때가 생각난다.
저녁 아홉 시, 익숙한 멜로디가 뉴스의 시작을 알리면 우리는 방으로 들여보내진다. 나는 침대에, 동생은 바닥에 편 이부자리에. 우리는 누워서 자는 척을 하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살그머니 일어나 방문을 열고 거실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뉴스마저 만화 영화처럼 흥미진진해지는 시간. 열린 문틈 사이로 안 자고 깨어있는 우리를 발견한 부모님이 “문 닫고 빨리 자라”를 세 번쯤 외치다 보면 먼저 잠드는 쪽은 언제나 동생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잠이 드는 데 시간이 걸리는 나는, 혼자 깨어있기 싫은 밤이면 이야기를 지어내 동생에게 들려주곤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인물이 예측 불허의 사건을 겪는 이야기. 걸핏하면 ‘그런데’나 ‘갑자기’가 등장해서 느닷없이 방향을 틀고 홀연 선회하는 이야기. 나는 “응” “그래서?” 같은 추임새, 쿡쿡 대는 웃음소리에서 동생의 취향을 간파하고 비슷한 설정을 몇 번 더 반복했다. 그렇게 누운 채로 천장을 보면서 한참을 떠들다가 문득 “자?” 하고 내가 물었고, 몸을 굴려 침대 아래를 보면 동생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대체로 동생을 잊고 살지만, 어쩌다 가끔 동생이 떠오르는 오늘 같은 날엔 내가 동생에 관해 아는 게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예스를 한꺼번에 일곱 개씩 먹는 이유나, 샤워를 하는데 화장실 천장이 젖는 이유야 모른다 쳐도 동생의 삶에서 내가 꼭 알아야 할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 동생도 이제 어엿한 어른이고, 걔도 나름의 고민이 있겠지. 누나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을지도 모르고. 같이 커피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 생각으로 명절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면, 다른 식구들은 진작에 일어나서 분주하게 제사 준비를 돕고 있는데 가장 마지막에 일어나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 방에서 기어나오는 동생이 있다. "뭐야, 벌써 준비 다했어?" 하품을 쩌억하며 히히 웃는 꼬락서니를 보노라면 도저히 이 말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 저래..."
이제 와 고백건대, 어렸을 때 나는 동생이 태어난다는 사실에 관해 별 생각이 없었다. 단순한 호불호의 감정조차 느끼기 어려웠다.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없듯, 가져본 적 없는 동생을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웃 어른이나 친척이 “동생이 생긴다니 좋겠구나?” 물을 때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으로 “네” 하고 대답했다. 시간을 돌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글쎄요” 라고 고쳐 대답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 누가 물어본다해도 내 대답은 여전히 "글쎄요" 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수 있을까. 동생이 없었다고 해서 내가 과연 지금보다 덜 행복했을지. 잘 모르겠다. 처음부터 없었으니 있었다면 어땠을지 따지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다. 무엇보다 학교 갔다와서 먹으려고 숨겨놓은 내 간식을 찾아내 천연덕스럽게 먹어치우곤 보란 듯이 히히 거리던 동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괘씸하기 짝이 없는데, 동생이 뭐가 좋다는 건지!
"저기 앞에 같이 서봐. 좀 가까이 붙어서, 다정하게, 응?"
커갈수록 동생이랑 사진 찍는 게 귀찮았다. 각자 얼굴에 여드름 나기 시작하고서부터는 아무튼 서로 근처에 있기도 싫었으니까. 그런 우리를 보고 어머니는 혀를 찼다.
"아휴, 쟤네는 남매끼리 왜 저렇게…쯧쯧."
나는 지금도 동생에게 다정한 말투로 사랑해, 뭐 그런 말은 못 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동생은 감격하는 게 아니라 수상한 표정으로 나를 볼 것 같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겠지. 왜 저래...
그러게, 정말 왜 그럴까. 동생들은, 또 누나들은.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아는 건, 누군가를 깨끗하게 싫어하고 싶다면 그가 자는 모습을 보지 않는 편이 좋을 거란 사실이다. 어떤 이의 잠든 얼굴을 보게 되면 그를 순도 100%로 싫어하긴 어려워진다. 동생이 있어서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