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크게 들이마시세요. 숨 참으세요. 숨 내쉬세요.”
10월은 (게으른 자의) 건강 검진의 달. 봄부터 쭈욱 미뤄온 검진일을 올해를 두 달 남기고 겨우 잡았다. 흉부 방사선 촬영, 혈액 검사, 소변 검사 등 바닥에 붙은 화살표를 따라가면서 병원의 프로토콜에 몸을 맡기자 30분도 안 돼서 검사를 마쳤다. 결과는 이틀 뒤에 전화로 알려준다고 했다. 건강 검진을 언제 마지막으로 했더라? 무려 7년 전이다. 모 방송사 최종 면접을 앞두고 모든 지원자가 회사가 지정해 주는 병원에서 검진받았다. 왼팔에 고무줄을 감고 피를 뽑으면서 합격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피부터 뽑아가는 이상한 회사라고 생각했다. 결국 불합격을 했는데 그때 받은 건강 검진 결과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엄밀하게는 2023년 10월이 무려 첫 정식 건강 검진이다.
“췌장도 괜찮고 간도 괜찮아요. 근데 흉부 X-ray 검사를 다시 해야 할 것 같아요. 폐 사진이 깨끗하게 보여야 하거든요? 근데 뭐가 있어요. 내가 봤을 땐 여성분들 유두가 있는 부분인데. 유두가 찍힌 건지 아닌지 정확하게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병원에 다시 내원하세요.”
유두요? 평소 자주 말하지 않는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듣자 나도 확인차 다시 물었다.
“네. 유두에 철사를 감고 다시 찍어야 해요. 이전 사진이랑 비교해서 위치가 같으면 다행이고요.”
철사요?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단어였다.
유두에 철사를 감아야 한다니! 병원 가기를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동네를 돌다가 혹시라도 병원 앞을 지나가지 않도록 빙빙 돌았다. 지언이한테 털어놓자 깔깔 웃으며 ‘2023 유두 사건’으로 명명하겠다고 했다. 간호사 선생님이 감아주려나? 아니면 내가 직접 감아야 할까? 선생님이 해주신다고 해도 내가 직접 감는다고 해야겠어. 아니면 감는 게 아니라 혹시 유두를 덮는 철사로 된 모자 같은 건 없을까? 수십 가지의 시나리오를 펼치다가 눈을 질끈 감기를 반복했다. 옆에서 지언이는 계속 웃었다.
며칠 뒤 다시 병원.
“(사진을 가리키며) 여기가 유두 자리거든요. 간혹 이렇게 유두가 찍힐 수가 있어요. 근데 아무리 유두로 의심된다고 하더라도 확인하기 전까진 정상이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유두인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펜 끝을 가리키며) 자 여기가 유두라고 합시다. 여기에 철사를 빈틈없이 잘 감아주세요. 아셨죠?”
올 것이 왔다. 간호사 선생님께서 안내하는 커튼 뒤로 들어가자, 철사 두 개를 건네주셨다. 이걸로 유두를 감아주시고 떨어지지 않게 테이프로 잘 붙여주세요. 손등에 테이프 두 개도 붙여주셨다. 건네주신 철사는 식빵 봉지를 감을 때 쓰는 끈이었다. 유두를 위한 모자까지 생각한 나로서는 어이가 없는 빵 끈이었다. 심지어 하나는 금색 하나는 은색이네. 식빵 봉지 좀 봉해본 실력으로 유두를 돌돌 말았다. 생각보다 잘 감아지네.
이틀 뒤 의사 선생님께 걸려 온 전화.
“유두에 철사를 잘 감으신 게 맞나요?”
“네. 잘 감았는데요.”
“그러니까 사진을 찍고 나서도 유두에 철사가 잘 붙어있었죠?”
“네. 그랬는데요.”
“아무래도 CT를 찍어봐야겠어요. 유두랑 미세하게 위치가 달라요. 폐 결절이 의심됩니다. 언제 병원에 오실 수 있으세요?”
폐 결절이요? 지언이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진료 의뢰서를 받아 들고 홍제역까지 갔다. 건강 검진도 처음이었으니 CT 촬영도 처음이었다. 삼엄하고 차가운 분위기에 발을 오므리고 앉아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침대에 누웠다. 천장에는 야자수 사진이 있었다. 뭐지? 야자수 풍경을 보며 긴장하지 말라는 의도를 알게 되자 더 긴장됐다. 침대가 자동으로 움직여 동굴 같은 원통으로 들어갔다. 숨을 참고 내쉬고를 몇 번 반복하면서 500장의 폐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을 분석하는 데만 1시간이 흘렀다. 억겁 같은 1시간이었다.
폐 사진이 담긴 CD를 들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
“아! 결절이 맞네요. 정말 다행입니다.”
“네? 결절이라 다행인 건가요?”
“네. 단순 결절입니다. 단순 결절은 건강에 해가 되지 않아요. 저도 결절이 있습니다. 이게 결절처럼 보이는 혹이나 종양이었으면 큰일인 건데 결절이니 정말 다행이네요. 앞으로 정기 검진하면서 살펴보면 됩니다.”
병원을 나오며 가족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결절 맞음. 의사 쌤도 있다는 단순 결절임. 건강 이상 무! 지언이도 이제 안도하며 웃었다. 이로써 2023 유두 사건의 정확한 명칭을 2023 폐 결절 사태로 수정하는 데 원만히 합의했다. 그동안 건강 검진 받는 일을 왜 그렇게 쉽게 미뤄왔을까. 건강도 소중하게 대해줘야 내 곁에 오래 있어줄텐데. 검진일도 다른 스케줄 뒤로 양보하지 않고 싶어졌다. 2년 뒤엔 1월에 예약할 거다. 빵 끈도 미리 준비해 간다.
P.S. 여러분~ 건강 검진 미루지 마세요~ 특히 30대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