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기운을 가진 자
삶이 고달프다고 하소연했던 어느 저녁 자리에서 추천 받은, 사주팔자를 기가 막히게 본다는 곳을 장장 3개월 동안 기다린 끝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심각한 얼굴로 내 사주팔자가 적힌 종이를 가만히 보시던 선생님(이라고 부르겠다)이 조금은 생뚱 맞은 이야기를 꺼냈다. “달의 기운을 타고 났네요.” 달의 기운? 그게 뭐지? 고개를 갸웃대며 궁금해하는 내게 선생님은 짐짓 근엄히 물었다. “사람들이 달 앞에서 뭘 하죠?” 글쎄요. 소원 빌기..?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달만 보면 일단 빌고 봤습니다. 달 기운을 가졌다는 건, 내 안에 담긴 욕망과 바램이 아주 많다는 걸 말해요.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은 분인 것 같네요. 그래서 힘든데, 그래서 살 맛이 나고 살 길도 거기에서 찾게 되는데 어쩌겠어요. 그런 걸 보통 팔자라고 부릅니다.”
보통은 불이다, 물이다, 이런 얘기만 나눴지 달 기운을 가졌다는 말은 처음 들어봐서 재미있네 하고 말았는데, 어쩐지 집으로 돌아와 바쁜 일상을 보내는 동안 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 그러네, 내가 이렇게 힘들고 고달픈 이유가 별 게 아니었구나. 결국은 하고 싶은 게 많고, 벌려놓은 것이 많아서, 나의 바램에 부응하느라 힘든 거였네. 그 생각을 할 때면 없던 힘이 조금은 나는 듯 했다. 결국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그것들을 다 해내보고 싶어서 이렇게 애쓰는 거라는 마음임을 알아차릴 때마다 얻게 되는 에너지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나는 30대가 되었으며, 결혼을 하여 다정한 반려자와 한 마리의 뚱냥이(10kg)와 함께 하는 가족을 만들었다. 이 여정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의 선택으로 인해 나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선택에 함께 책임을 지고 함께 리스크를 감수하는 경험을 배우게 되었다. 혼자일 때는 오롯이 나 혼자 결정하고 나 혼자 책임지면 되던 일이, 이제는 내 선택이 직접적으로 누군가의 일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게 된 것이다. 크 고작은 선택에 있어 나 뿐만 아니라 상대가 겪게 될 변화까지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그것은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은 ‘달의 기운을 가진 자'에게는 꽤 실감 나는, 결코 가볍지 않은 변화였다. 체력 고갈과 에너지의 유한함은 나날이 크게 느끼는데, 커리어도 배움도 창작도 놓치고 싶지 않아 바둥대는 나로 인해 혹시 반려자가 외롭지는 않을까, 이 조각조각의 욕망들이 사실은 무엇으로도 수렴되지 못한 채 욕심으로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지극히 다정하고 나를 먼저 위해주는 반려자 앞에서, 내가 즐겨했던 그 ‘달의 기운'이라는 농담이 조금은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표현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너무 바쁜 것 같아서 미안해. 다음 달에는 이거 이거 이거를 꼭 조율해볼게.” 새벽 한두시가 넘어서까지 일하다 지쳐 퇴근하는 날이 이어지던 날이었다. 어렵게 꺼낸, 다소 풀 죽은 내 말을 들은 반려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선재가 힘들어서면 그래도 되는데, 나한테 미안해서라면 정말로 안 그래도 돼. 선재가 선재의 세계에서 열심히 하고 싶은 것들에 매진하는 것처럼, 나도 내 세계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열심을 다하고 있거든. 하루 8시간씩 요리를 하고, 테니스에 매진하고, 쇼파에서 하뚱이를 괴롭히기도 했다가, 틈 날 때면 서너시간씩 게임도 한다고. 자기와 나의 바램과 즐거움의 종류가 다른 것 뿐, 나도 충분히 열심을 다하고 있으니, 자기의 열심에 너무 미안해할 필요 없어!” 반려자의 다정한 변호를 들으며 생각했다. 내 안의 많은 바램과 욕망들을 욕심이 아니라 꿈이자 목표로 바라봐주는 이 사람에게 내가 느끼는 고마움과 감동 만큼, 이 믿음을 허투루 쓰지 말아야 겠다고. 지금은 여러 곳에 뿌린 씨앗에 물을 주고 가지치기를 하느라 너무 바쁘지만, 또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는가! 언젠가는 이것들이 정말로 여러 그루의 나무가 되어, 다양한 열매를 맺고 꽃을 피워 하나의 정원으로 우리의 삶에 다가와 줄지도.
이것이 단순히 나이브한 로망 만으로 남지 않게 하고자, 오늘 하루도 하루 치의 최선을 다해본다. 아마도 머지 않은 곳에 존재할, 수많은 ‘달의 기운을 가진 자’들에게 심심한 애정과 응원을. 그들 곁에 있을, 묵묵하고 든든한 반려자들에게는 결코 심심치 않은,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보내는 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