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꽤 긴 휴가를 떠났다. 휴가지에서 맛있는 식당 보다는 훌륭한 커피집 물색에 여념이 없던 나는, '왜 맛있는 커피에 이렇게 집착하고 있지?'하는 생각에 빠졌다. 피에 목마른 뱀파이어처럼 눈이 뒤집혀 있다니. 나는 커피를 어째서 이렇게 좋아하게 된 걸까? 아니, 사랑에 빠지듯 좋아하게 된 걸까, 아니면 좋아하기로 굳센 결심이라도 했던 걸까.
대학교 때 학교 근처에는 카리부 커피가 많았다. 미네소타의 콩다방쯤 될까? (별다방은 이미 많았다) 공항에도, 몰에도, 학교에도 카리부 커피가 있었다. 거기서는 늘 핫초코를 마셨다. 겨울이면 영하 40도의 추위로 유명한 지역답게 다들 핫초코에 진심이라서, 초코의 선택지도 화이트, 밀크, 다크 3가지나 됐다. 각각 다른 초콜릿을 녹여서 따끈한 우유에 섞어줬다. 진짜 초콜릿이 든 핫초코라니, 맛이 없을 수 없었다. 크. 핫초코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침 8시 수업도 갈만했다. 날이 추워지면 아침 대신에 늘 핫초코를 마셨고, 덕분에 매장에 들어가면 나를 본 바리스타가 오더를 넣어둘 지경이었다. 아침 8시 수업이 있었던 그 한 학기 동안 약 5킬로가량 체중이 불었다. 그렇게 카페를 드나들면서도 한 번도 커피를 사러 간 적은 없었다. 내가 늘 핫초코에 진심이었다면, 같이 드나들던 친구는 블랙커피를 달고 살았다. 그 친구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방 옆 칸에 쿡 찔러놓은 큰 텀블러가 떠오른다. 혀가 델 정도로 뜨거운 블랙커피를 선호했는데, 나로서는 참 이해하기 어려웠다. 픽업 대 앞에서 물었다. “커피의 매력이 뭐야?” “사실 매력으로 먹는다기보다는, 생존이지.” 어째서 생존을 위해 핫초코가 아닌 블랙커피를 택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핫초코는 연료로서의 기능도 뛰어나지 않나.
교환학생으로 몽펠리에에서 학교에 다녔다. 기숙사 1층의 카페테리아에서는 매일 아침 뺑오쇼콜라 혹은 크루아상과 에스프레소를 줬다. 늘 같았다. 하루는 뺑오쇼콜라에 에스프레소. 하루는 크루아상에 에스프레소. 과일이나 채소 하나 없이 생 위(?)에 버터와 커피를 들이부으면 잠깐은 프랑스인이 된 것처럼 낭만에 젖을 수 있었으나 속이 좀 많이 쓰렸다. 생애 처음으로 어쩔 수 없이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게 된 것이다. 블랙커피도 못 마시는 주제에 에스프레소를 마셔댔다. 안 마실 수도 있는데 왜 마셨냐. 다 이유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함께 교환학생의 신분으로 온 미국 친구들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우리는 프랑스어 공부하러 와서는 프랑스 음식 기행만 하다 떠났다) 우리는 다 다른 학교에서 온 학생들로, 서로 밥이라도 한 끼 같이 할 친구가 필요한 처지였다. 그때 우연히 색소폰을 부는 친구와 친해졌고, 그는 늘 에스프레소를 두 잔 마시고 하루를 시작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맛있어?” “맛있는데. 미국 카페테리아보다 훨씬 맛있어.” “흠…. 이게 맛있는 거야?” “응!” 이후로는 아침마다 커피를 잘 음미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래, 이게 괜찮은 맛이라는 거지. 매일 조금씩 커피 맛에 길들어 갔다. 그때부터 자발적으로 커피를 사 마셨다.
커피와 나의 관계에서 단연 중요한 인물은 우재다. 왈식땅을 만들던 시절 우리는 동고동락하던 동료였고, 그는 지금 같은 수준의 커피 문화가 자리잡지 않았던 때부터 좋은 커피에 대한 기준을 갖고 있는 커피 애호가였다. 우재가 어디에서 00 커피를 사 먹으라고 하면 일단 달려갔다. 당시 혜화동 사무실 근처에 ‘보통의'라는 커피점이 새로 생겼는데, "맛있어요~!"라는 우재의 코멘트 없이도 사무실 동료들이 '보통의'를 제 집 드나들 듯 했을지 의문이다. 그는 당시 커피 문맹인 왈팀을 교화하고자(내 추측이다) 간헐적으로 커피 신문을 발행했다. 종이 귀퉁이에 조그만 글씨로 쓴 신문은 ‘라테는 고소한 라테'라는 스테레오타입에 갇혀 있었던 우리에게 산미 있는 라테의 매력에 빠져보라 권하고, 강배전과 약배전이 뭔지를 가르쳐줬으며, 워시드와 내추럴의 차이를 알려줬다. 이 신문의 힘은 강력해서 스타벅스가 맹위를 떨치던 때 스타벅스 커피를 완전히 끊게 만들었다.
입에 털어 넣자 마자 짜릿한 맛도 있지만, 시간을 두고 점차 좋아지는 맛도 있다. 커피처럼 첫입에 좋아하기는 쉽지 않지만 서서히 배우면서 좋아지는 것을 두고 ‘acquire a taste for’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맛에만 국한되어서 쓰이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는 맛을 습득한다는 뜻이다. 아보카도나 고수, 와인, 낫또나 김치 같은 음식을 떠올려보면 조금 더 쉽게 와닿는다. 일반적으로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매력을 느끼게 되는 음식들이다. 어찌 보면 맛이라는 표현과 습득한다는 말이 부딪히는 게 아닌가 싶다. 맛은 굉장히 직관적인 감각인데, 습득은 노력하며 배우고 익힌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냥 누리면 되는 것 아닌가 싶은데, 노력해야 한다는 뉘앙스가 있다. 재밌는 건 누리라는 것인지, 배우라는 것인지 어색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 누리는 것과 배우는 것이 대척점에 있지 않아서 일까? 첫입에 짜릿한 맛과는 다르게, 좋아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맛은 한번 좋아하기 시작하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 딱 그만큼 깊게 빠져든다.
좋아하는 일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다. 좋은 것은 그냥 좋아하게 될 거라는 기대, 좋아하는 것은 노력 없이 빠져드는 일일 거라는, 그런 기대 말이다. 그런데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은 아무런 노력 없이 ‘빠져드는' 일이 아니었다. 더 많이 좋아하기 위해서는 애쓰는 시간이 필요했다.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패하고, 성공하고, 그렇게 애쓰다 보니 그걸 좋아하게 되는 거였다. 사람을 좋아하는 일도, 테니스를 좋아하는 일도, 명상을 좋아하는 일도 모두 같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좋은 것도 잠시 있을 수는 있겠지만, 많은 경우 정말로 좋아하고 싶다면 노력이라는 걸 해야 했다. 시간과 노력을 쏟지 않고 깊이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커피를 정말로 좋아하고 싶다면 도서관에 가서 커피에 대한 책도 몇 권 읽어보고, 커피 신문도 받아 읽고,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동네 바리스타 아저씨와 얼굴을 트고 서당개의 자세로 종종 주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다양한 커피를 마셔봐야 하지 않을까? 커피에 대해서 더 많은 걸 알게 될수록 커피를 누리게 됐다. 나는 커피를 어느 날부터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니라, 커피를 좋아하기 위해서 나도 모르게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은 아주 귀한 일이라 꽁으로는 생기지 않는 모양이다. 가능한 한, 내가 지금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좋아하고 싶다고 다짐한다. 새해 다짐이다.
한 와인 마스터의 말 “지금 내 입맛에 맛있는 와인이 훌륭한 와인처럼 느껴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평가가 객관적인 국제 평가 기준에 부합하지는 않아요. 여러분에게는 주관적인 품질 평가 기준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로 훌륭한 와인은 여러분의 기준을 뛰어넘는 겁니다. 배움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도, 무엇보다 누릴 수도 없어요. 당신에게 보르도 그랑 크뤼를 살 돈이 없다면 억세게 운이 좋은 겁니다. 축하합니다! 배움 없이는 그런 와인을 마신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게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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