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배고픔을 너무 빨리 느낀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금방 배가 부르고 빨리 배고픔을 느끼는 편인데, 식단을 바꾸고 나서는 배고픔이 더 심해졌다. 원래 먹던 대로라면 잠에 들기 전까지 배고픔을 전혀 느끼지 않았는데, 저녁 9시만 되어도 극심한 배고픔이 찾아왔다. 짝꿍은 내가 배고파 하는 모습이 힘들어 보이면서도 웃겼는지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으며 이렇게 물었다.
“몸 상태가 어떠세요?”
“책을 읽고 싶은데요… 배가 고파서 집중력이 없어요…”
“뭐 먹고 싶어요?”
“뭘 먹고 싶은 건 아닌데요. 먹으면 맛있게 먹죠." (어이없이 웃는 짝꿍의 웃음)
“그러니까 지금 뭘 먹고 싶어요?”
“(질문이 끝나자마자 냉큼) 떡볶이요”
침대에 엎드려 누워서 ‘배고파… 배고파…’ 외치며 짝꿍의 질문에 힘없이 대답하는 모습을 다시보니 무척이나 웃겼다. 배고프면 주섬주섬 뭔가를 먹을 법도 한데, 배고픈 게 힘들면서도 더 먹지는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니 배고픔을 느끼는 시간이 점점 더 늦어졌다. 밤 9시만 되어도 배가 고프던 게 11시 즈음이 되어서야 배가 고팠고, 어느 날에는 잠에 들 때까지도 ‘배가 고프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이제는 음식물이 이만큼만 들어오는군. 자기 전까지 잘 분배를 해야겠어!' 몸도 적응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식단을 조절한지 두세 달의 시간이 흐르고, 체중계에 올랐다.
‘와… 이렇게 안 빠졌을 수가!’
1kg 조금 넘게 줄기는 했지만, 기대한 만큼의 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다지 좌절스럽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좋은 변화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잠에 들기 전까지도 속이 더부룩한 편이었는데, 식단을 바꾼 이후로는 속이 편안하여 잠을 더 깊게 잘 수 있었다. 또, 식사를 준비해 주는 짝꿍의 입장에서는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고, 요리하는 시간과 수고도 줄어들었다.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하는 내 입장에서도 뒷정리하는 시간에 대한 부담이 덜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건 ‘절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실감하는 것이다. 짝꿍이 찍은 영상 뒷부분에는 이런 내용이 더 있다.
“뭘 먹고 싶어요?”
“떡볶이요. 근데 내가 지금 살찌는 거 때문에 안 먹는 게 아니에요.
절제에 대한 연습으로써 안 먹는 거지. 채울 수 있지만 채우지 않는 거예요.”
“(반어적 뉘앙스로) 하… 참 대단한 도반이세요…”
배고픔에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이라 생각하고 웃고 넘길 수도 있지만, 꽤 의미가 있는 말이라 느껴지는 건 두 달째 절제를 매일 훈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배고픔을 느끼면, 무언가를 먹으며 배고픔을 해소하고, 더 나아가서는 배부름에 만족감을 느끼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배고픔을 채우려고 하기보다는 배고픔을 느끼고 내버려 둘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배고픔을 채워줄 수도 있지만 채워주지 않는 선택지도 생겼달까. 이름을 붙여주자면, ‘배고픔과 거리 두기'가 가능해졌다. 물론, 극심한 허기를 느낄 때까지 굶지는 않지만, 참을만하면 참아보는 것도 나만의 적절한 ‘정도’를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느꼈다.
내게 맞는 적절한 ‘정도’를 찾고, 스스로 조절하며 삶의 균형을 잡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 물어 답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더더욱. 사람마다 ‘부족하다'거나 ‘지나치다'고 느끼는 정도가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몸의 변화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적절한 정도라는 게 달라지기도 하니까. 잘 살아간다는 건 ‘매 순간 균형을 이룬다'는 의미가 아닐까. 지금이 나아가야 할 때인지 멈출 때인지, 채울 때인지 비울 때인지, 변화해야 할 때인지 받아들여야 할 때인지를 알고 균형을 이루는 것. 그러기 위해 오늘도 내가 할 일은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