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낮잠에 빠진 어느 날 오후, 꿈을 꿨다.
오랜만에 친정에 갔다. 문은 열려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평소 물건으로 꽉 차있는 우리 집답지 않게 집안이 휑했다. 막 이사를 간 집처럼. 어리둥절하며 집을 둘러보고 있는데 현관에서 손글씨로 빼곡한 편지를 여러 장 발견했다. 엄마 글씨였다. 엄마는 나와 동생, 아빠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녀는 떠난다고 했다. 멀리, 여기서 아주 먼 곳으로. 자주 만나지 못할 거라 했다. 그래도 가끔은 우리가 어릴 적 갔던 찜질방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 했다. 더는 읽을 수 없었다. 손이 떨리고 눈물이 쏟아지고 다리는 힘이 풀려버리는 바람에. 엄마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구나. 아니, 엄마에게 다른 사람이 생길 리 없다. 그러나 정말 그럴 리 없을까? 엄마는 처음부터 나에게 ‘엄마’였으니 내 입장에서는 가능할 리 없지만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한 사람으로 보자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엄마는 지금 어디쯤 있는 걸까. 아빠는, 동생은 지금 어디에 있고 그들의 마음은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엄마와 아빠가 갑자기 동시에 나타났다. 엄마는 내 앞에 아빠는 내 뒤에서. 엄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왕 울음이 터졌다. 다시 보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보니 우릴 버리고 떠났다는 게 사무치게 원망스러우면서도 다시 나타나줘서 기쁜 울음이 터져 나올 만큼 고마웠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흐릿한 시야 속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꽂아 놓고 애원했다.
그냥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아빠랑 함께 이 집에서 계속 살아주면 안 될까? 지금까지 잘 그래왔잖아. 응?
엄마는 내가 모르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엄마는 그저 까마득히 멀어져 가고만 있었다. 뒤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건 말하지 말자… 체념한 듯 무거운 목소리였다. 편지를 다 읽고 나면 아빠 같은 목소리가 되는 걸까. 그러나 아빠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시야에서 엄마를 놓쳐버리면 영영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나는 아무 말 하지 않는 엄마에게 점점 뭉개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렇게 그 사람이 좋아? 우리를 버리고 갈 만큼?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갔다.
그제야 엄마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누구랑 같이 사는 게 아니야. 혼자 떠나는 거야. 이젠 그래도 좋을 것 같아. 오랫동안 같이 살았으니까.
나 어릴 적에 어른들은 종종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걸 잃어버린, 그러나 되찾기엔 이미 늦어버린 얼굴. 커다란 파도에 멀리멀리 휩쓸려가는 무력한 얼굴. 엄마는 그런 얼굴이었지만, 한 구석에서 환하게 떠오르는 노란 햇살의 빛깔이 어렴풋이 비쳤다. 아주 작고 희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빛이었다. 엄마는 미소 짓고 있었다. 슬픔이 있었지만 슬픔을 건너간 미소였다. 그 순간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풀렸고 눈물이 멈추었고 입을 다물었다. 그 어른의 표정을 하고 있는 건 나였다.
퍼뜩 눈을 떴다.
여기는 어디일까. 낯선 방, 낯선 시간. 거친 숨소리와 빠르게 흔들리는 눈동자. 뿌연 시야에 한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왜 그래? 악몽 꿨어?
꿈이었나. 꿈이었구나. 낯선 남자의 얼굴이 아니라 현우의 얼굴이구나. 그제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터지는 눈물처럼 이야기가 끝났다는 걸 알아차리고 난 뒤 숨이 차도록 엉엉 울었다. 어느새 눈물은 얼굴을 뒤덮었고 몸 깊숙한 곳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다. 현우가 연신 눈물을 닦아주었다.
엄마가 가족을 떠났어. 살아있는 데 떠났어. 혼자 살고 싶대. 그래서 떠난대. 엄마를 도저히 못 보낼 것 같은데 잡을 수가 없었어. 떠나지 말라고 말도 못했어.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떠나왔으니까. 떠나는 엄마에게서 내가 보였어.
20년을 꼭 붙어있던 딸이 느닷없이 떠난다고 한다. 잡으려 하니 나를 좀 놔달라고 한다. 조금 더 신중하게 선택하고 가족의 울타리에서 안전하게 움직이라고 하니 그럴 수는 없다고, 지금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단다. 눈물이 쏟아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아이의 손을 꽉 잡아보지만 아이는 손을 빼고 고개를 돌린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 할 때면 절박하고 허무한 마음이 된다. 아이는 활을 떠난 화살 같아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앞만 바라보며 쏜살같이 날아갈 뿐이고 부모는 아득히 멀어져 가는 화살을 바라보는 활처럼 우두커니 서있을 따름이다.
스무 살 이후 나의 삶은 가족으로부터 떠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대학교를 가면서 집을 떠나고, 유럽에서 살아보겠다며 떠나고, 돌아와서는 혼자 자취를 하겠다며 떠나고, 얼마 뒤 연인과 살겠다고 동해로 떠났다. 몇 년 뒤에는 엄마 아빠가 도리어 결혼을 부추겨 공식적으로 독립을 했다. 지금 나는 가족으로부터 떠나는 딸이 아닌 가끔씩 가족을 만나러 오는 손님 같다. 두세 달에 한 번 친정집에 들렸다 돌아갈 때면 엄마는 나를 꼬옥 안아주고 환하게 웃으면서 보내준다. 가지 말라고 두 손을 꼭 붙잡는 게 아니라 잘 가라며 웃으며 안아준다. 언젠가부터 엄마로부터 기꺼이 보내질 때마다 눈물이 비집고 나온다. 30년 동안 앞만 보고 날아간 화살이 이제야 활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게 아니면 이제는 엄마가 나의 화살이 되어 아득히 멀어져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떠나가는 사람이 아플까. 떠나가는 걸 바라보는 사람이 아플까. 처음으로 떠나가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비록 현실이 아닌 꿈이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선명한 경험이었다. 이제는 너도 꽤 컸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떠나가는 사람을 바라볼 준비를 하렴, 삶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잠깐 바라보았을 뿐인데 이토록 울어버리고 만 걸 보니 나는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았나 보다.
“아이들은 그대를 통해서 왔으며 그대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그대와 함께 있을 지라도
아이들은 그대의 소유가 아니다. (...)
그대는 아이들의 활이며,
아이들은 그대를 통해서 살아있는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가리라.”
They come through you but not from you,
And though they are with you yet
they belong not to you. (...)
You are the bows from which your children
as living arrows are sent forth.
Kahlil Gibran의 『The Prophet』 <On Children> 中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