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좋아하나요, 묻는다면 지금으로선 답은 하나뿐이다. 근 몇 개월 나의 삶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어느 날 아침, 왼쪽으로 볼록한 가느다란 그믐달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달을 언제 어디서 볼 수 있는지를 몰랐다. 달의 모양이 매일 달라지고 뜨고 지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도,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27일하고도 7시간 좀 넘게 걸린다는 것도. 태어난 이후 줄곧 달과 함께 했으면서 이토록 모르고 살았다. 왜 아무도 달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속삭여주지 않은 걸까.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달이 보이기라도 하면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뜨고 지는 시간을 예측할 수 있는 태양과 달리 달은 언제 나타나서 사라지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변덕스럽고 수줍은 달이 점점 더 궁금해져서 온갖 책과 인터넷을 샅샅이 찾아가며 알고 싶은 것들을 알아갔다. 누군가에게는 기본적인 상식일 수 있지만 내게는 모든 게 새로운 사실들이었다.
달, 너는 누구니?
고개를 들어 물은 순간, 달이 지구의 중력에 이끌려 돌아가듯이 나의 삶은 달을 중심으로 궤도를 돌기 시작했다. 달을 사모하는 이는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 경건한 의식을 치른다. 해가 지고 검푸른 빛이 드리울 즈음 동쪽 바다로 간다.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붉은 보름달이 바다 위로 서서히,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떠오른다. 보름이 되기 한참 전부터 그날의 날씨를 살펴보고 언제 어디서 보름달을 볼 것인지 고민하고 장소를 찾아본다. 이번에는 어떤 보름달을 만나게 될까? 보름이 되기 며칠 전부터 생각이 온통 달빛으로 가득 차 있다. 바다 위로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마음은 도통 가라앉지 못하고 흥분된다.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있는데 바로 ‘달뜨다’이다. 달이 뜨면 ‘달뜬’ 마음이 된다. 이 단어를 만든 옛사람들도 달을 보며 달뜬 마음이 되었던 것일까? 이 글이 발행되는 2월 24일은 2월의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이므로 나는 검푸른 바닷가 어딘가에서 둥근 달을 경건하게 맞이한 순간부터 아침 해가 떠올라 달이 서쪽 너머로 희미하게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고 전송할 것이다.
달은 나를 물리학으로 이끌었다. 과학에는 영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눈을 반짝이며 물리학 책을 탐독하고 있다.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표현한 ‘아름다운’ 방정식들을 이해할 수 없어 그 단순한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겐 친절한 물리학 선생님들이 있다. 그들이 방정식이 어떤 의미인지 최대한 쉽게 풀어 설명해 주기에 나처럼 과학을 모르는 사람도 그 아름다움을 살짝 맛볼 수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까마득한 옛날부터 세상은 멈추지 않고 움직이며 질서와 무질서를 펼쳐왔다. 선생님들은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를 오가며 인간이 보는 세상과 본래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를 속삭여준다.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나의 감각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실재하고 있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선생님들조차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러나 실재하는 무언가가 눈앞에 얼마나 많을지도 생각한다. 과학은 인간의 무지를 깨닫게 하고, 인간이 얼마나 납작하고 단순하게 세상을 감각하는지 깨닫게 한다. 그런데 이 깨달음은 나를 무력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선한 바람이 되어 숨통을 트이게 한다.
나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기독교 너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울타리는 가족뿐이었고 안온한 울타리 너머로 나갈 이유는 없었으니까. 다만 일요일마다 교회에 갈 때, 여기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이 내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생각과 행동이지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예컨대 헌금을 내는 일이나 친구나 모르는 사람을 전도하는 일 같은 것. 그러나 그런 불편함도 잠시, 일요일은 그저 가족과 함께 정다운 나들이를 다녀오는 날이었다.
모든 것이 달라진 건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재를 양성하는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소개하는 이곳은 학교보다는 교회에 가까웠다. 생각과 태도, 관계 등 모든 것이 같은 믿음 아래 하나의 정답으로 존재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 전부 나는 알지 못하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며 그의 가르침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어떠한 의심도 갖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공부를 할 때나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나 ‘하나님’이라는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이곳의 생활이 괴이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의심은 순백의 믿음과 대비되어 매일 매 순간 불순하고 컴컴해졌다. 어쩌면 진짜로 이상한 건 나일지도 몰랐다.
학교에 입학하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수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창조와 진화’라는 과목이었다. 세상의 기원과 지금에 이르게 된 과정을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과학을 전공한 교수님들이 매주 차례로 강단에 서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과정과 증거들을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 열정적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문스럽기만 했다. ‘이건 증거가 아니잖아. 단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거잖아. 이런 걸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교수님들은 진화론에 대해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했고 나는 ‘납득이 안되는 건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론인걸…’ 혼잣말하면서도 수업은 성실히 들었다. 그리고 열심히 암기해서는 높은 성적을 받았다. 시험을 마치고 문을 나설 때 ‘그래도 창조론은 아닌 것 같아.’라고 중얼거리며 걸어 나왔다. 마치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법정을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혼잣말 한 것처럼. (사실 이는 전해져내려오는 이야기일 뿐 실제로 갈릴레이가 그렇게 말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후 9년 동안 과학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다. 그러다 느닷없이 달에 푹 빠져 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 1956~)는 과학이란 ‘세상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나 변하지 않는 사실을 발견하는 학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연구를 바탕으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찾아내고 공유하며 불확실한 가운데 계속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쌓아온 사실들이 단 하나의 발견으로 ‘아무것도 아니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지식의 가장자리, 그 경계 너머의 세계로 시선을 둔다. 안전한 믿음에 기대고 싶은 사람에게 과학이란 의지할 구석이란 없는 변덕꾸러기일 따름이다. 한편 먼지만큼 작고 하찮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아무리 알고자 해도 알 수 없는 지식의 한계를 정확하게 아는 용기가 있는 사람에게 과학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세상의 속살을 보여준다.
내가 우주에 대해 한평생 알 수 있는 내용은 개미 발자국보다 작을 것이다. 그 ‘작고 적음’이 지금 무언가를 생각하고 공부하고 감각하는 것을 무상하게 만들지만 그게 허무하지는 않다. 과학은 끊임없이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라고 말해주지만 나는 그 말이 믿음직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만나 의미 있는 질서를 만들고 그 의미 있는 것이 또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돌이켜보면 누군가의 믿음대로 세상을 설명해놓은 틀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암기하고 있을 때, 마음이 공허했고 세상은 흥미롭지 않았다. 나로서는 세상이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던 바와 얼마나 다른지 아무것도 믿지 않고 계속 알아가는 삶이 편안하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에 가깝다면 그쪽을 선택하고 싶다. 확실하고 충분한 근거가 없다면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태도, 믿음이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냉소적인 태도는 어떤 환경에서는 ‘불순하다’고 불리지만, 어떤 환경에서는 ‘과학적’이라 불린다. 이제야 나는 나의 시각과 태도를 기꺼이 긍정할 수 있게 된 듯하다.
5년 후, 나는 누구와 함께 있고,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내가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지 모르고 짝꿍도 내 곁에 있을지 모른다. 언제든 누구든 나를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의 떠남을 기다리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나 5년 후, 여전히 이 세상에 살아있다면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때에도 나는 달을 보고 있을 거라는 점이다. 달은 지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내가 살아있는 시간은 달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일 테니 달이 지구를 더 이상 돌지 않는 세상은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아득히 먼 달의 시간과 감쪽같이 사라질 나의 시간을 생각한다. 달을 떠올리면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고, 곁에서 영롱히 수줍게 웃는 친구의 따뜻한 손을 잡는 기분이 된다. 달을 생각하면 불안하지 않다. 단 조금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