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2일간 침묵 안거 수련에 참여했었다. 새벽 4시부터 저녁 9시까지 스케줄에 따라 길고 짧은 명상 수련을 반복하며 틈틈이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 참가자들은 80명 정도 되는데,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고 가능한 한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단체 명상 홀 외에는 1인 1실에 머문다. 핸드폰은 제출해야 하고 읽을거리나 쓸 거리도 가져갈 수 없다. 철저히 자기 자신을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하루에 딱 한 번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저녁 8시 30분부터 9시 사이 수련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날마다 10시간씩 수련을 했기 때문에 궁금한 것이 정말 많았다. 30~40명의 참가자가 저마다의 질문을 하기 위해 한 줄로 서서 대기를 했다. 전체 질문 시간은 30분 정도였기 때문에 각자 1분 남짓의 시간이 주어지는 셈이었다. 나는 10가지 질문을 5가지로, 3가지로, 그리고 정말 어렵게 1가지로 줄였다. 단 하나의 질문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내가 정말로 궁금한 게 이거 맞나?’ 여러 번 반문했다. 처음에는 앞 사람이 비슷한 질문을 해서 미리 답을 듣기도 했다. 과정이 절반 이상 지나면서 추려낸 질문들은 수련 기술 자체 보다 나의 수련 경험에 기반한 것들이 많았다. 질문은 언제나 하나만 했고 역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궁금한 점이 말끔히 해결된 날도 있었지만, 더 헷갈린 적도 있었다. 그런 날은 여전히 불완전한 느낌 속에서 다음 수련에 임해야 했다.
2024년 1월, 왈이네에서 8주간 불안 완화를 위한 명상 코스를 지도했다. 이 코스에서는 이미 여덟 번째 기수를 맞이했기에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코스가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다.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은 수업의 절반 이상으로 나름 넉넉하게 마련해두었는데, 첫 몇 번 회기의 수업이 30~40분 이상 시간이 초과되어 끝났다. 질문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모든 질문이 반갑고 때로는 매우 중요한 질문들도 있어서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을 감고 수련해야 할 시간을 쓰지 못할 만큼 여러 질문이 쏟아진 날이 있었다. 그제야 나는 대답을 잠시 멈추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했다. 질문을 하기 전에 잠시 질문을 품어보자고. 내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지 아니면 불안해서 묻는 건지를 구분해 보고 정말로 궁금한 질문 한 가지만 해보자고. 열띤 토론을 이어가던 중 생경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다시 질문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진 후 ”아차차! 사실 중요한 질문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고 다른 질문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후에도 수업 중에 여러 질문이 있었지만, 그 전과는 다르게 의미 있는 질문들이 많이 나왔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깊이 생각한 후에 내놓은 질문을 통해 예상치 못한 것을 배우기도 했다.
최근에 대학원의 연구실에서 행정 보조로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언론사에서 잠깐 일해봤던 경험과 창업 경험밖에 없던 나는, 대학원의 행정 시스템이나 업무 스타일을 파악하는 데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문서로 된 가이드라인이 거의 없어서 사소한 질문도 동료에게 계속 물어봐야 했고, 바쁜 교수님께도 계속 직접 질문을 하게 됐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점점 많아지고 기한도 촉박해지면서 내 질문 속에는 나도 모르게 답답함이 섞이기도 했다. 바쁜 업무가 한 차례 지나간 후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번 업무에 대해 몇 가지 질문과 제안 사항을 준비해 갔다. 지시하신 업무 목적이 불분명해서 업무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의구심이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업무 목적이 분명해야 지금 취하는 전략이 적절한지 파악할 수 있고 목적에 맞는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업무를 지시하실 때 목적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 그렇다면서 “(목적을 말하지 않아도) 그냥 당연히 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대답했다. 또 내가 진취적인 면이 있어서 좋기도 하지만 다소 어그레시브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나는 준비해 온 다음 질문을 꺼낼 수 없었다. 이후 나는 ‘강제로’ 업무 관련 질문들을 품게 되었다. 질문이 생겼을 때는 복잡하게 섞여 있는 모든 폴더를 하나하나 열어보면서 필요한 정보를 찾았다. 그래도 못 찾을 때는 급하지 않은 경우라면 며칠씩 더 기다렸다. 그렇게 업무 메신저에 무수히 올린 물음표들이 점차 잦아들었고, 사실 질문을 안 해도 괜찮은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남겨두는 상황도 괜찮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반면 모르면 안 되는 상황도 있었는데 그럴 때만 질문을 했다. 평상시에는 그 두 가지를 구분하려고 애썼다.
‘질문하라. 멍청한 질문은 없다. 멍청한 질문이 세상을 바꾼다.’ 이런 구호들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문화권의 사람들을 독려하고자 쓴 구호 아닐까. 정말 ‘멍청한 질문’은 없는 걸까? 그동안 답을 빨리 찾고 싶어서 했던 질문은 다소 멍청했던 것 같다. 누군가의 몇 마디 대답을 들으며 불안을 일시적으로 잠재우는 정도의 역할만 했다. 그 질문은 마치 해결된 것처럼 보였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니었다. 몇 년 전에 인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을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질문만 있는 책이다. 인도에서 저마다의 답을 찾아왔다는 글이나 책을 많이 접했던 터라 나도 그곳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 내심 기대했었다. 그 책을 덮으면서 다른 다짐을 했다. 답을 찾는 대신 좋은 질문을 찾아보겠다고. 그게 벌써 수년 전인데 나는 아직도 질문 속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좋은 질문’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당연히 답도 찾지 못했다. 몇 달 혹은 몇 년씩 한 가지 질문 속에 살기도 했다. 잘 모르는 느낌 속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일은 지치고 힘들었다. 하지만 분명히 좋았던 순간도 있었다. 질문을 푸는 것을 멈추었을 때 그랬다. 질문을 품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답을 찾아내려고 애쓰지 않고 질문 속에서 그저 머무르는 몇몇 충분한 순간이 있었다. 그런 날들은 겉으로 봤을 때는 움직임이 없거나 침묵으로 보였던 것 같다. 다행히도 그렇게 오래 품은 질문들은 정말로 더 ‘좋은 질문’을 낳았다. “엄마, 하늘은 왜 파란색이야?”로 시작되었을 나의 질문 역사가 삼십여년을 거쳐왔다. 내일은 또 어떤 질문을 마주하게 될까. 어디 한번 품어보자는 마음으로 맞이해본다. |